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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할 말?”

진지한 목소리로(늘 진지한 목소리였다.) 전화로 멤버들을 불러 모은 히로토는 할 말이 있다고 해놓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답답함에 한토가 먼저 말을 꺼내보지만 그럼에도 히로토는 물을 마시며 목소리를 가다듬을 뿐이었다.

“히로토, 이렇게 불러놓고 아무런 말을 안 하고 앉아있기만 한다고 해서 저희가 무작정 계속 기다려 줄 수는 없어요.”

결국 렌이 말을 꺼낸 후에야 히로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세를 고치며 이야기할 준비를 마친 듯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긴히 알려줄 말이 있어서야.

“미우에 대한 이야기야, 이건 아직은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난 것 같아서 너희한테도 알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무슨 일인데요?”

숨을 다시 한 번 들이마시고 내뱉은 히로토가 말을 이었다.

“미우가 곧 약혼할 것 같아,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약혼식 이야기가 오갈텐데 놀라지 않았으면 해서.”

일순간 사키가 들고 있던 컵을 놓쳐 테이블 위로 안착하지도 못한 컵이 허공을 떠돌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라 사키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사키는 저를 부르는 이들 틈에서 벗어나 급하게 카페를 뛰쳐나갔다. 히로토, 그 얘기 정말 믿어도 되는 거야?
날이 너무 맑아서 눈이 부실 정도였고, 운동화를 신고 계속해서 뛰는 사키는 바람에 머리가 엉키고 숨이 턱턱 막힘에도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히로토의 말이 사실인지 제가 직접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목이 따갑다. 숨이 막힌다. 미우가 있을 집까지 뛰어 도착한 사키가 숨을 고르며 초인종을 눌렀다.

“사키?”
“미우…….”

무슨 일이냐고 채 물을 수도 없었다. 사키를 집에 들인 미우는 말 대신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숨을 돌리며 물을 마신 사키가 목 끝까지 찬 울음을, 눈앞까지 나온 눈물을 애써 꾹 참으며 미우의 두 눈을 마주했다. 미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무슨 일이야, 응?”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 있던 미우지만, 사키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그 이상 캐물을 수는 없었다. 입을 다문 미우는 그저 사키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서 말해줘, 물어보고 싶은 게 뭔지.

“히로토가…….”
“응.”
“미우가 약혼 할 거라고 했는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했다. 날이 너무 맑아 눈이 부셨다. 히로토가 전해주었다던 말이 정말 제가 약혼한다는 말이었다면, 미우는 오늘만은 아무리 제 오빠라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미우.

“만약 정말 약혼 하는 거라면 말이야.”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사키가 떨고 있어,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한 거야. 오빠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사키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빛났다. 조금 더 좋은 걸 해줄 수 있었는데, 사키가 이거면 좋다고 해서 샀던 저와의 반지가. 그 빛마저 미묘하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사키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오빠가 헛소리를 했던 거라고,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전부 다 정리된 이야기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고쳐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사고가 정지된 기분, 생각이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미우, 대답해줘.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해? 헤어져야 하는 거야?”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정말 그래야 하는 거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묻고 싶고,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지만 미우가 지금 할 일은 그게 아니었다. 우선 눈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사키를 먼저 달래야만 했다. 제 오빠에게 따지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지만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사키를 달래는 것이었고, 사키에게 집중해야 했다. 사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약혼 같은 거 안 해.”
“그럼? 히로토가 없는 말을 한 거야?”
“그건, 그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미 다 끝난 얘기야. 오빠는 다 못 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약혼할 생각 없어, 사키가 뻔히 있는데 왜 해.”

필요 없어, 그런 건.
사키의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 미우가 천천히 생각해본다. 그녀에게 어느 부분부터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말이다.

“일단 말하자면 약혼을 할 거라는 얘기가 집안에서 나오긴 했어.”

그렇지만 할 마음이 없고, 그래서 얼마 안 가 정리된 이야기였어. 상대를 누구로 할지까지 이야기가 나온 참이기는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고, 부모님도 그런 거라면 그 사람 소개해달라고 했고, 그래서 그렇게 정리가 됐는데 오빠는 상대를 누구로 할지 정해진 그 부분까지만 연락을 받았는지 혼자 설레발쳐서 이야기를 해준 모양이야.

“미안, 오해하게 만들어서.”
“그럼, 안 헤어져도 돼?”
“당연하지, 왜 헤어지려고 하는 거야. 헤어지고 싶은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럼 됐어.
여전히 바람에, 달려온 것 때문에 헝클어진 채 엉망이 되어있는 사키의 머리를 손으로 조금씩 정리해주며 미우가 웃었다. 그래도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실히 느끼기는 했어, 약혼 하게 됐다는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숨 막힐 정도로 급하게 뛰어 왔잖아.

“사키는 정말─”
“응?”

소파에, 제 앞에 앉아있는 사키를 꼭 안은 미우가 사키의 어깨 즈음에 고개를 파묻으며 말을 뱉었다.

“좋아해, 정말 많이.”
“가, 갑자기?”

으음, 하는 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미우의 등 위로 따스한 손이 올라온다. 함께 꼭 미우를 안은 사키가 웃으며 말을 이어냈다.

“나도 좋아해.”
“오빠한테도 말해줄 걸 그랬다, 사키랑 사귀고 있다는 거 말이야.”

여태 비밀로 했던 거야? 비밀로 했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말을 안 해줬을 뿐인데?

“그래서 나까지 불러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히로토, 괜찮을까?
왜?

“소스케나 렌, 한토랑 군페이는 다 알고 있어, 나랑 미우 사귀는 거 말이야.”

큰일 났네, 오히려 잘 됐나? 내가 안 해도 알아서 뭐라 해주지 않을까? 그래도 오면 뭐라 하긴 해야겠지만.

“몰라,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고 싶어.”
“갑자기? 미우, 가끔 보면 진짜 뜬금없어.”
“약혼 한다는 얘기에 곧 울 것처럼 여기까지 뛰어와 준 애인 생각해서라도 충실하고 싶은데, 그럼 안돼?”

아, 안될 건 없지.
그래도 다행이다, 미우랑 헤어지는 일은 안 생겨서. 사실 뛰어오면서 많이 무서웠으니까. 정말 만약에 미우랑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와버린다면 어떤 반응을 해주어야 했는지, 약혼을 한다면 나는 축하를 해주어야 맞는지, 아니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오면 축하를 해줄 수는 있었을지. 달려오면서,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무서웠어. 미우에게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그 말 한 마디에 진실을 알러 뛰어올 정도로 미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은 전해졌으면 좋겠다. 좋아해, 많이.

“미우, 있잖아.”
“응?”

미우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운 사키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빛났다. 더 이상 그 빛이 흔들리지 않아 미우는 조금 안심했고, 사키는 맞잡은 그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많이 좋아할 거야.”
“고마워, 나도.”
“그리고, 그리고 절대 안 놓고 싶어. 포기 안 하고 싶어, 미우 손 꼭 잡고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붙잡힌 제 손을 들어 사키의 손등에 짧게,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사키에게 눈을 맞췄다.

“포기할 일 없게 할 거야. 그리고 말해두는데, 나도 사키 포기할 생각 없어.”

말을 끝마치고 입술에 짧게 소리가 날 정도로 아주 짧게 입을 맞춰준 미우가 사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아서,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 아니라 될 수 있다면 평생이라도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너무 죽을 것 같다고. 이렇게나 크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 저도 몰랐기에, 그게 하물며 이 햇살처럼 빛나고 따스한 여자인 줄은 더 꿈에 몰랐고, 그래서 네 모든 게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따스해. 채 말로 다 전달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표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내 마음을 담을 단어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야.

“사키, 말 나온 김에 주말에 부모님 뵈러 안 갈래? 하도 성화셔서…….”

네가 불편하다면 굳이 가지 않아도 돼, 잘 말할테니까. 음.

“아냐, 갈래. 가고 싶어.”

귀여워, 채 말로 뱉지는 못한 미우가 입 안에 그 말을 머금고 사키를 바라보기만 했다. 제가 귀여운 걸 자기도 알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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