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켄쟈 25-26화의 네타 있습니다.
* 두 사람은 이미 연인사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캐붕 多
01
앓아누운 겐타가 쿠로코들에 의해 치아키의 방으로 옮겨졌다. 펄펄 열이 끓는 사람을 그대로 응접실에 둘 수 없다는 것이 남아있던 모두의 의견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타케루를 따라나간 류노스케나 마코, 코토하의 방 보다라야 치아키의 쪽이 낫겠다는 그들만의 판단이 있었는지 몰라도. 어쨌든 치아키도 들려가는 겐타를 보며 '차라리 이게 낫지'라는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들린 몸과 함께 빠르게 들어온 쿠로코 한 명이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치아키는 바닥에 전시해둔 것 마냥 널브러진 만화책들을 발로 밀어내면서 착착 잠자리를 준비하는 쿠로코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미리 방 청소라도 조금 해놓는 건데.
치아키는 더 있으려는 쿠로코들을 괜찮다는 말로 물리고, 평소에 쓰던 것보다 더 두툼하게 충전된 솜이불을 상대에게 덮어준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마 위 식어가는 물수건이 애처로워 보인다. 치아키는 다리를 책상다리로 하고 앉아 왼쪽 겨드랑이에 끼워진 체온계를 꺼내 숫자를 읽었다. 38도 9부. 아주 심하지는 않았지만 높은 열이다. 긴장을 푸는 것은 조금 더 미루기로 하고 치아키가 방문 앞의 작은 대야를 끌어당겼다.
응접실에서 뒤로 벌러덩 넘어가는 그 장면이 느리거나, 혹은 빠르다고도 느껴졌다. 그렇게 건강한 애가 말이야. 낮게 궁시렁댄 치아키가 이마 위 건조해진 수건을 걷어 대야 속 찬 물에 집어넣었다. 물이 닿은 손이 찌르르하게 저린다. 손을 열심히 움직이다가도 머리맡에 놓인 덜먹은 약과 뜯다 만 해열 패치에 자꾸만 눈이 갔다. 병원이라도 데리고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참 좋을 텐데. 치아키는 애꿎은 하늘 속 달을 노려본 뒤 물을 짜낸 수건을 아직 뜨끈한 이마 위에 천천히 올렸다.
병간호야 덤벙거리는 아버지 덕분에 손에 익은 일이었지만, 앞에 누워 기절잠 을 자고 있는 겐타의 모습에는 충분히 위화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까 본 적 없지? 점점 고르게 가라앉는 숨소리에 시름을 놓은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메바쿠라를 잡으러 꿈 속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오니 전혀 다른 장소여서,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속으로는 놀랐다. 하필이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오는 바람에. 다이카이신켄오를 타케루와 단 둘이서 움직이게 했다는 무용담을 자랑하는 듯한 그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던 것이 그제야 생각이 나 치아키는 다시 한 번 죽은 듯 자고있는 상대를 내려다 보았다. 멍청이. 일어나면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줘야지.
02
끼웠다 뺀 체온계에 띄워진 온도가 37도.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숫자에 조금 안도한다. 치아키는 이미 깔려진 제 이불을 끌어 바짝 겐타의 옆으로 붙이고 나서야 자리에 누울 정도의 심적여유가 생겼다. 불을 끄니 새삼 방 안이 꽉 찬 것이 느껴질 정도여서, 치아키가 말없이 눈을 세차게 깜빡거렸다. 어둑한 방을 채우는 똑딱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와 일정하게 섞여오는 고른 숨소리가 이래저래 귓속을 간지럽힌다. 꺼진 조명이 달린 천장을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환자를 걱정한다는 명목하에 치아키는 누운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불룩 올라온 이불이 위아래로 상하운동을 반복한다.
이불 옆구리로 툭 튀어나온 손에 눈길이 갔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이불의 것인지 온전한 체온인지 모를 뜨뜻한 열기가 신경을 타고 올라와 소리없는 탄성이 나온다. 제 손으로 완전히 위를 덮은 치아키가 숨을 죽였다. 손바닥을 감싸고도는 온기에 모기라도 물린 것 처럼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아픈 애한테 뭐하는 짓이냐는 죄책감과 동시에 점점 커지는 떨림이 몸을 짓누른다. 결국 뒤척거리는 소리에 바르르 손을 뗀 치아키는 거기까지 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부스럭 하는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얕은 숨소리. 그리고 부어올랐을 목과 오랜 잠으로 보기 좋게 갈라진 목소리가 낮게 흘러들었다. 긴장으로 굳은 몸이 뻣뻣하다. 기어이 일을 쳤구나 타니 치아키.
" ... 너 그러다가 옮는다. "
" 시끄러워.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잖아. "
" 그러니까 옮지 말라고 그러는 거 아냐. "
각자의 이불 속에서 시작된 작은 말싸움은 결국 겐타의 손 위로 치아키의 손이 덮여지고 나서야 멎었다. 아 정말 시끄럽네. 환자면 그냥 조용히 있어. 칵 하고 독뱀같은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고요해진다. 초침이 다섯 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머리는? "
" 괜찮아. "
" 어지럽거나. "
" 없는 거 같아."
그럼 다행이지만.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치아키가 이마 왼쪽으로 흘러내린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냉기대신 열을 흠뻑 머금어 뜨끈하게 익은 수건을 아까보다 미지근해진 물에 담그자 참방, 하고 작은 소리가 일었다. 꼭꼭 물기를 짜내고 나서 이마에 올라간 수건은 아까보다 덜 빠진 물 덕분에 철퍽, 하고 얹어졌다. 이마를 중심으로 퍼지는 냉기에 다물어진 입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역시나,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눈 사이에 깊게 계곡이 생겼다.
" 어림도 없어. 약 먹을래? 아니, 먹어. "
" 싫어... "
" 안 먹으면 헤어짐. "
넌 그렇게 쉽게 헤어진다는 말이 나와? 벌떡 일어나는 몸에도 아랑곳 않는다. 네-네-라는 대답과 함께 익숙하게 약을 까 물컵과 같이 건네는 손이 빨랐다. 일어났으니까 잘 됐네. 먹고 다시 누워.
코팅되지 않은 알약을 받아든 표정이 몹시 울상이다. 톡 건드리면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은 놀라운 표정에도 치아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서 먹으라며 말없이 턱짓을 할 뿐이었다. 결국 설득이 무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챈-그래봤자 이 방 안에서는 제일 늦었지만-겐타가 입을 비죽거리다가 입안으로 약을 던져 넣었다. 물을 두 잔이나 받아들고 나서야 겨우 넘어간 약은 입안에 잔뜩 쓴맛을 남긴다. 얼굴근육이 기하학적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던 치아키가 잠시 고민하다가 한쪽에 벗어둔 스카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 딸기맛 좋아해? "
" 난 다 잘 먹어. "
너 답다. 얼굴로 쓴맛을 표현하던 겐타가 껍질을 깐 사탕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제서야 치아키는 감기 걸린 사람에게 단 것을 먹이면 안 된다는 것을 떠올렸다가, 일어나면서 떨어진 물수건을 스스로 이마에 올리며 다시 자리에 눕는 겐타를 보며 그 떠올림을 치워버렸다. 뭐 어때.
입 안에서 녹아가는 사탕을 도르륵 굴리는 소리. 별안간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불-정확히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겐타를- 바라본 치아키가 미간을 좁혔다. 나름 '화났어요'의 표출인건지 울룩불룩 움직이는 이불 뭉텅이에 치아키가 손을 내려치자 푹석하는 김빠진 소리와 함께 잠잠해진다. ... 싶다가 다시 꿈틀꿈틀. 이번에는 표정이 아니라 온몸으로 불만을 말하는 중이시란다. 한 손으로는 이불을 약하게 내려치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감싼 치아키가 속에서 딱 제 나이만큼 묵은 한숨을 끄집어냈다.
03
치아키의 표정은 말 그대로 '골치 아프다'의 식이었고, 그 표정을 바라본 겐타는 미끄러지는 물수건을 이마 위로 다시 고정시키며 말이 없다. 장난인 것은 알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응접실에서 멀어지던 치아키와 코토하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걱정시키게 한 것은 자신임을 알았지만, 비틀어지는 입술 사이로는 하나밖에 뱉어낼 수가 없었다.
" ... 치아키. "
" 응. "
" 하지 마. "
장난이라도.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끌려나오는 방금 전의 제 말에 치아키가 입을 다물었다. 나 아까 심장이 저기까지 튀어나온 거 알아? 손가락으로 허공에 손짓하던 겐타는 별안간 잠잠해진다. 여전히 들리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머문다. 결국에 남는 것은 어색한 공기였다. 여기서 치아키는 잠시 5 분 전 과거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가 겹쳐지는 온기에 말없이 눈을 끔벅였다. 손을 덮는 체온이 따스하다.
일종의 사과다. 항상 먼저 그래왔고 이번에도 변함이 없어 치아키는 입을 비죽거렸다. 달빛에 젖어 물빛같은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시선은 변함없이 평소와 같아 부끄러움에 핫핫해진다. 정말 이 착해빠진 남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치아키는 '선생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나 좀 알려주지.' 하고 몇 번이나 속으로 외쳤다. 편협한 머리와 다물어진 입으로 여러 번 생각했고. 나온 결론은,
" 미안. "
" 응. "
위아래 입술을 꾹꾹 누르며 먼저 미소를 걸었다. 대답하듯 꼭 동여잡는 손이 온기를 더한다. 긴장이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힐끗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 치아키가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끌어올렸다. 더 늦게 자면 아침에 늦잠 잘 거야. 조심스럽게 이불 안으로 들어가자 온기를 잃고 썰렁하게 식어가던 이불이 사부작 소리를 내며 몸짓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까 열 재야하는데, 뜯어놓은 해열 패치도 써야 하고. 할 일이 많은 데, 피부에 닿는 따끈한 감촉이 다른 생각마저 모두 지배해버린다.
" 손 계속 잡고 있어도 돼? "
" ... 감기 옮는다며? "
" 약 먹었으니까 괜찮지. "
" 그런 게 어딨어. "
" 여기. "
맞잡은 손에서 피어난 온기가 진득하게 머무른다.
시계소리와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물빛과 달의 색이 들어찬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