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히이] Life goes on
*본편 관련 스포 및 미래조작 있음. 부상 소재 주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긴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른다. 그 법칙은 하나야 타이가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그의 머리칼엔 예전보다 새치가 조금 더 생겼고, 얼굴에 약간의 나이가 든 대신에 전보다는 유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야는 제 나이가 40이 되었을 때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엔 집착했지만 자신의 삶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오래 살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죽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속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자신에게 살아서 할 일이 남았노라고 이야기했다. 싸움은 끝났어도 하나야를 비롯한 의사들에게는 현실과 싸워나갈 의무가 남았다.
하나야 클리닉은 몇 년 전에 문을 닫았다. 예방 접종으로 일반적인 게임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 게임병으로 인해 소멸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만이 과제로 남은 상황에서 게임병 전문 병원은 명맥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폐원 소식을 전했을 때 애써 다시 얻은 의사 면허가 쓸모없게 되었다면서 아깝다고 투덜대던 니코에게는 게임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더 늘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 아니냐면서 웃었지만 내심 섭섭한 마음도 사실이었다. 면허가 박탈되어서 정식 의사가 아니게 되었던 과거에 비하면, 면허도 그대로 있지만 병이 없어져서 일이 사라진 지금이 더 낫지 않느냐는 생각에는 거짓이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 하나야가 있는 곳은 한적한 시골의 보건소였다. 전문적인 진료를 할 수는 없지만 보건부에서 그가 게임병 박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였기에 게임병 이외에도 진료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준 덕이었다. 엉덩이 무거운 보건부 어르신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해 주었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도 누군가의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세이토 대학 부속병원 병원장 정도 되는 사람이라든가. 본인은 그런 일 없다며 부정했지만 마침 그 옆에 있던 쿠죠 키리야와 뽀삐 삐뽀빠뽀의 반응으로 미루어 그 부정은 거짓임이 분명했다.
"자. 이제 안 아플 거야."
"토오루.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라고 해야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다음엔 여기 올 일 만들지 말고."
"네!"
치료가 끝난 아이와 그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나서 보건소는 다시 조용해졌다. 작은 산골 마을의 보건소라는 것이 원래 잡다한 상처를 돌보거나 주기적으로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었기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기로 한 건 하나야의 선택이었다. 조금 더 근교의 보건소로 배정받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이곳을 고른 건 하나야 역시 다년간의 사건으로 지쳐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 결정을 전했을 때 하나야의 주치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허가를 내렸다. 예전처럼 심각한 상황에 함부로 몸을 던질 일도 생기지 않았고,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주기적으로 검진만 한다면 건강엔 지장이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 얼굴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는 나이를 먹고 있었으나 하나야의 눈에는 여전히 어리기만 했다.
하나야의 주치의는 아주 유능했다. 어린 나이부터 커리어를 쌓아 온 그는 아버지에게서 병원을 이어받아 병원장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수술에, 학회에, 병원 관리, 언론과의 인터뷰. 그 어느 분야에서도 그를 찾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곧 미국에서 귀국할 때인가. 하나야는 커피 머신에서 나온 커피를 홀짝이면서 그가 미국에 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디 보자, 날짜가……. 어라? 오늘이잖아. 시차까지 고려하여 표시해둔 날짜는 틀림없이 오늘이었다. 아마 그는 지금 하늘을 날면서 각종 논문과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눈이라도 제대로 붙이면 좋으련만. 그는 언제나 하나야에게 몸을 돌보라고 했지만 하나야 역시 그에게 똑같은 소리를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통신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왔다. 화상을 켜자 다급해 보이는 얼굴의 호죠 에무가 보였다.
"에그제이드? 무슨 일이야? 네가 다 연락을 하고."
"타이가 씨. 혹시 뉴스 보셨어요?"
"뉴스?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잘 들으세요. 흥분하지 마시고요. 저도 방금 CR로 돌아오다가 들었어요. 아까 뉴스 속보가 나왔는데, 히이로 씨가……."
그다음 말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은 무작정 세이토 대학 부속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카가미 히이로는 뼛속까지 의사였다. 그랬기에 그는 환자가 발생했다면서 기내에 의사가 있는지 찾는 승무원의 부름에 아무런 의심 없이 응답했다.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던 환자가 돌변하여 어디서 났는지 모를 날붙이를 겨누며 그를 인질로 잡는 건 순식간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그는 가만히 있었다. 겉보기에 공범은 없어 보였다. 단순히 우발적인 범행인지 숨은 동료가 있는지 섣불리 파악할 수 없었기에 히이로는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질범은 승무원을 시켜서 사람들에게서 귀중품을 걷으라고 시켰다. 히이로는 여기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인질범이 지목한 승무원은 히이로를 불렀던 그 승무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근처에 승무원 두세 명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인질범이 날붙이를 들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비행기를 타러 오는 과정에서 일반 승객이 한 번도 이것을 들키지 않았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곳에 불시착하라는 말까지 하는, 어설픈 영어를 쓰고 있는 인질범과 사람들에게 귀중품을 내놓으라며 유창한 영어를 쓰고 있는 승무원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직감적으로 결론 내린 히이로는 틈을 봐서 인질범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책을 읽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인도어 파인 히이로였지만 어머니의 교육 방침으로 기본적인 호신술은 익혀 두었고, 가면라이더를 하는 동안 싸워 온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는 버그스터에 비해서 고작해야 날붙이 하나를 든 인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역으로 인질범을 제압한 히이로는 수상한 승무원을 가리키며 저 사람도 잡으라고 소리쳤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던 그녀가 강도로 돌변하는 건 일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총을 겨눈 그녀를 보고 아차 했지만 히이로가 피하기 전에 총알이 더 빨랐다. 쓰러져가는 히이로의 시야에 사람들이 그녀를 제압하고 자신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히이로를 위협하던 인질범은 피가 흐르는 히이로를 보고 무기도 놓치고 부들부들 떨었다.
사격 실력이 형편없는 강도라서 다행이었다. 조준은 심장인 모양이었으나 총알은 히이로의 어깨에 박혔다. 왼쪽 어깨가 타는 듯 했다. 피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겠지. 당황하는 사람들에게 괜찮다는 말도 다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사건이 벌어진 건 일본 도착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히이로는 금방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 사고가 난 당사자가 세이토 대학 부속 병원 원장이라는 사실은 금방 병원에도 알려졌고, 히이로는 헬기로 실려서 병원에 도착해 총알 제거 수술을 받았다. 휴일에 급하게 불려 나온, 히이로 다음으로 외과에서 이름난 의사가 수술을 집도했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히이로는 병실로 옮겨졌다. 상태가 악화하지 않았고 수술도 성공적이었기에 눈을 뜨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하나야는 털썩 주저앉았다. 지옥에 열 번쯤 갔다가 온 기분이었다. 히이로의 얼굴은 새하얗게 떠 있었다. 차마 손도 뻗지 못하고 그 얼굴을 보던 하나야는 찾지도 않던 신을 찾았다.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면서.
* * *
사락사락. 누군가가 머리칼을 만지는 느낌에 하나야는 눈을 떴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따스한 체온과 함께 느껴지는 것이 익숙한 체향이란 걸 깨달은 순간 하나야는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본 시선의 끝에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히이로가 보였다.
"왜 네가 더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총을 맞은 건 난데."
"심장 고쳐 놓고 도로 떼어 가려는 줄 알았어. 미국 학회 갔다 온댔지 총 맞고 온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미안하다…, 타이가."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히이로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었다. 다시는 자신을 두고 어딜 가지 말라는 듯이. 자신에게 생명을 돌려줘 놓고 함부로 가 버리지 말라는 듯이 그렇게. 그러고 싶은 욕망을 손을 꼭 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나저나 어쩐다. 할 일은 산더미인데 몸이 이래서야."
"그 몸을 해 놓고도 일 생각이 나?"
"이래 보여도 짊어진 게 많아서 말이지."
"그래……."
히이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병원장으로서도, 천재 의사로서도, 게임병을 완전히 없애고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한 열쇠를 쥔 사람으로서도 큰 임무를 한 몸에 지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야는 자신이 히이로에게 자신의 몫까지 책임을 전가한 것이 아닌가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생각만 하고 말로 하기를 미뤄 왔던 말이 하나야의 입에서 술술 나왔다. 늘 무언가에 막혀 나오지 않던 말이 이렇게도 쉽게 나오나 싶을 정도로.
"히이로."
"응…?"
"게임병 연구를 돕고 싶다. 네 곁에서. 겸사겸사 너와 생활도,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군. 물론 네가 그럴 생각이 든다면 말이야."
하나야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야가 게임병 클리닉을 닫고 보건소로 떠날 때 히이로가 제안한 사항이었다. 당시에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 대답하고 미뤄둔 이 대답을 하기까지 몇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멋없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는데. 하나야가 뒤통수를 긁으며 시선을 피하자 히이로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다치지 않은 오른팔로 하나야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순순히 이끄는 대로 제게 다가온 하나야와 이마를 맞추고 히이로는 말을 이었다.
"진심 한 번 듣기 힘드네. 이런 일 없었으면 얼마나 더 걸렸을지."
"미안."
"미안하단 말은 이제 노 땡큐다. 게임병 연구원 하나야 타이가. 짐은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시켜서 옮기도록 하지."
못 말린다니까. 히이로의 단호한 얼굴에 조금 더 그곳에서 정리하고 오겠다는 말을 꺼낼 생각도 접은 하나야는 피식 웃었다.
"갑작스러운 말을 들었더니 조금 졸리군. 잠시만, 더 자겠다. 이따, 보도록 하지. 타이…가……."
자신에게로 몸을 기울인 채로 잠든 히이로를 제대로 눕혀 준 하나야는 히이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스스로 손을 올려 자신의 심장 소리도 들었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는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에 눈에 띄게 안심하며 하나야도 잠기운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