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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에이] Merry-Chri

*본편 내용과 결말 및 오즈포제 메가맥스 극장판 스포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쿠스쿠시에는 여느 날보다 더욱 들떠 있었다.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이 모두의 마음에 마법처럼 작용하기 때문인지 12월 25일이 다가올수록 정말로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일하게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은 앙크는 혼자서 방 안에 틀어박혀 메달을 모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들뜨든 말든 그리드인 앙크가 알 바 아니었다. 에이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도 앙크가 거기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홀딱 젖은 채로 들어온 에이지는 앙크가 있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패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에이지에게 툭 하고 질문을 뱉은 건, 전적으로 앙크 자신의 변덕 때문이었다. 결코 에이지가 자신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어이 에이지. 인간들은 왜 전부 크리스마스에 들뜨는 거냐?"

대답하지 않는 에이지가 무시하는 건가 싶어서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참에 에이지로부터 돌아온 답은 앙크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앙크는 그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해?"

"질문을 먼저 한 건 이쪽이다. 뭐, 내 대답을 듣고 싶은 거라면. 좋다. 그것 역시 인간의 욕망 때문이겠지."

​​

"그렇구나. 내 생각도 앙크와 별로 다르지 않아.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 선물같이 특별한 날 하루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바람 때문 아닐까?"

"흥.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도 결국 무언가 선물로 받고 싶다는 욕망 때문 아니냐. 그거라면 언제라도 상관없잖아?"

앙크의 반론에 에이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크리스마스는 선물에만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니까."

"흥.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군."

더 흥미가 없어졌다는 듯이 둥지 안쪽을 향해 홱 돌아누운 앙크를 잠시 바라보던 에이지는 문을 닫고 다시 일터로 향했다.

* * *

앙크에게 크리스마스가 왜 특별한 날인지 이해시키는 일은 에이지 자신보다는 히나나 치요코 씨가 적격인지도 몰랐다. 자신 역시 크리스마스를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앙크에게 질문을 돌린 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기 보호 본능 탓인지도 몰랐다.

에이지의 기억 속 크리스마스엔 늘 선물이 가득했다. 바라는 물건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던 삶에 크리스마스 선물은 조금 더 값비싼 선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굴뚝을 타고 내려오는 산타클로스는 빨간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하고 있더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 살아볼 시간도 에이지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명망 있는 집안에서 가문 계승이나 출세와는 연이 없는, 몇 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들의 존재란 창피하지 않을 만큼만 돈을 발라 적당히 치장한 인형과도 같았다. 에이지가 원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꽤나 시시하고 사소한 것이었으나 다른 비싼 것은 다 얻을 수 있었어도 그것만은 얻을 수가 없었다. 선물이 가득한 양손을 비우고 나면 언제나 쓸쓸할 뿐이었다. 그나마 에이지를 아껴 주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나서는 에이지의 크리스마스는 늘 혼자였다.

늘 외로웠던 유년기의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나서는 크리스마스는 에이지에게 크게 특별하지 않은 날이 되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들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함께 분위기를 맞추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는 크리스마스 같은 걸 신경 쓰기에는 여유가 없는 곳을 다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의 존재와 그 분위기를 실감나게 다시 경험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크리스마스 장식용 트리를 세우고 가게 내부 꾸미기도 도우면서 에이지는 자신의 손으로 크리스마스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에 슬쩍 웃었다. 자신에게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손길이 닿은 크리스마스가 기쁨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 *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는 꼭 함께 보내자는 치요코 씨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에이지는 12월 말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코우가미 회장의 지시로 준비된 마중을 받아 그와 이야기하고 나서 안전하게 쿠스쿠시에까지 모셔지다시피 한 에이지는 치요코 씨의 바람대로 상처 한 톨 없이 모두와 만날 수 있었다. 상처를 입지 않은 건 일본에서뿐이었지만 말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입었던 상처는 이번에도 꽤 있었지만, 코우가미 코퍼레이션에서 세계 곳곳에 파견해둔 의료진 덕에 적어도 겉보기에 커다란 상처는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히노! 오랜만이야."

"에이지 군, 무사해서 다행이야…!"

바쁠 텐데 모두가 에이지의 귀환에 맞춰 쿠스쿠시에에 모여있었다. 갑작스러운 호출로 늦어지게 된 고토만이 다테를 통해 아쉬움을 전했다.

"늦게라도 갈 수 있으면 갈 테니 먼저 즐기고 있으라는데, 고토 쨩도 조금 섭섭한 눈치야."  

다테 역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몸이었으나 운 좋게 귀국 시기가 겹쳐서 간만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제 프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히나와 여전히 형사 일로 바쁜 신고도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다준 사토나카 역시 퇴근 시간이 가깝지만 특별히 조금 더 있겠다면서 자리에 앉아 파티 음식을 가져다 먹고 있었다.

모두가 시끌벅적한 파티 분위기였다. 몇 년 만에 경험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쿠스쿠시에는 주인인 치요코의 활기찬 분위기 그대로였다. 많은 사람이 속속 도착해서 크리스마스 파티에 합류했고, 그 덕분에 에이지도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다행히 파티가 무르익었을 때 검은 코트를 입은 고토가 숨을 몰아쉬며 문을 두드렸고, 그런 그를 모두가 케이크 세례로 맞아 주었다. 이렇게 모두가 모인 것도 오랜만이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근황도 나누면서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했다.

모두와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지만, 에이지는 자꾸 다락방을 힐끔거렸다. 그가 이제 거기 있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 * *

 


에이지가 돌아온다는 걸 알아서인지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다락방은 오늘따라 더 깔끔해 보였다. 모두가 돌아간 뒤에 정리정돈을 돕고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에이지는 다락방으로 돌아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즐거웠지만 정신없는 하루였다. 만난 지 오래된 사람들임에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행복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들에게서 받은 선물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건 내일 아침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어릴 적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도 에이지를 이렇게까지 기쁘게 만들지는 못했었다.

에이지는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변한 것이 없는 다락방에 단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앙크가 늘 자리 잡고 있던 높은 곳, 그것 하나뿐이었다. 붉은 천 위에서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기계를 만지고 있던 그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지 수년이 흘렀다. 에이지의 주머니 속에 언제나 들어있는 깨진 메달 조각이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에이지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 손을 뻗으면 제 손을 마주 잡아오는 이형의 손이 있었다. 분명 그는 존재했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잠시 돌아온 적은 있었고, 에이지의 희망은 그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는 메달이 언젠가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날이 오리란 사실을.


"앙크, 나한테 줄 크리스마스 선물 없어?"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걸 알고 하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던지는 상대방이 옆에 있었다고 해도 무슨 헛소리냐며 코웃음 칠 것이었다. 그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이지는 피식 웃었다. 사실 앙크는 이미 에이지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에이지가 가장 원했던 것을 준 것도 앙크였고, 바란 적 없었던 것까지 손에 쥐게 해 준 것도 앙크였다. 에이지에게는 앙크가 산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 그러고 보니 앙크도 산타도 붉은색이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면 앙크가 더욱더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에이지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으며 소원 하나를 빌었다.

"앙크,​ 있지. 내 소원은 말이야……." 


소원을 빌고 난 에이지의 입은 얼마 안 가서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 * * 


-여전히 바보 같은 놈.

아무에게도 들릴 리 없는 목소리는 성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깃든 건 분노만은 아니었다. 모순적이게도 거기엔 기쁨 또한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드 앙크는 종말을 맞았다. 원래 생명이 아니었기에 끝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드에게 죽음이란 사치가 주어졌다. 앙크는 정말 그걸로 끝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영혼만이 남아서 에이지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자신도 당황했었다. 사실 거기서 굳이 에이지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따라가 주기로 한 것은 앙크의 의지였다. 또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에이지의 목적이 자신을 되살리는 거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존재하지 않을 몸인데도 전율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것은, 에이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에이지가 자신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한 자신의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에이지가 자신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앙크에게 생명을 맛보게 해준 것도 에이지라면, 그것을 다시 한번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존재 역시 에이지였다. 아니, 이제 자신의 생명도 욕망도 모두 히노 에이지라는 하나의 인간에게 귀결되는지도 몰랐다.

-칫. 역시 안 되는군.


앙크는 에이지를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만질 수가 없었다. 에이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게 할 수도 없었다. 앙크는 분명 그곳에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에이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자신은 분명 이곳에 있노라고 말 한마디 걸 수 없었다. 에이지가 위험에 처해도, 에이지가 애타게 도움을 구해도, 목소리를 내어 자신을 찾아도 앙크는 그 어느 것에도 응해줄 수가 없었다. 주머니 속 메달을 만지는 에이지를 보고도 앙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켜보면서 애를 끓이는 것뿐이었다. 다시 한번 녀석이 부르는 목소리에 응해줄 수만 있다면, 다시 한번만이라도 녀석이 도움을 구할 때 손을 뻗을 수가 있다면. 앙크의 염원은 점점 집념이 되어갔다. 자신의 존재를 인지했던 유일한 자가 미래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자신이었고 그가 딱 한 번 자신 쪽을 돌아보고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에이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사라졌던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분명 자기 자신인데도 할 수만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없애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런 자신을 모르는 에이지는 이불까지 걷어차면서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 어디서나 잘 자는 에이지였지만 익숙한 장소로 돌아와서인지 편한 얼굴로 세상 근심 없다는 듯이 잠이 들어 있었다. 에이지의 자는 얼굴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차올랐던 분노가 가라앉은 앙크는 에이지가 찬 이불을 끌어 올려 보려 했으나 유령인 상태라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멍청한 놈이 감기에 걸리지나 말아야 할 텐데. 잠들지도 않는 유령 팔 하나가 밤새 에이지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난 에이지는 자신이 잠결에 이불을 다 차버렸음을 깨달았다. 추운 겨울이기에 재채기라도 나와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몸이 춥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에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러 문을 나섰다. 오늘은 여느 때보다 따뜻한 크리스마스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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