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드 엔딩 스포 존재
내일은 어떡할까.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질문을 되뇌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 방금 전이었던 것 같은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이 구르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순간은 길지 않았다. 짧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킨 센토는 급히 부딪혀 욱신거리는 팔을 만지작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주위를 지워버릴 듯한 강한 소나기에도 그는 몸을 일으켜 낯이 익은 주변에 살짝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나시타 앞에? 평범한 손님으로서 이곳을 방문할 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힐끗 보고 한밤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센토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꿈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생생한 꿈.
“뭐야. 안 들어온다 싶더니 왜 밖에서 그러고 있어?”
“반죠?”
“어? 어. 왜.”
“너 왜 거기서 나와.”
거짓말처럼 열린 문에 기대어서 물음을 건넨 남자는 센토가 유일하게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죠 류우가. 언제나 입고 다니는 스카쟌을 벗어두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은 잠에서 막 깬 듯 보였다. 퉁명스러운 표정의 그는 미동 없이 비를 맞고 있는 센토를 바라보며 하품을 했다.
“왜 거기서 나오기는. 여기 살고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너 나랑 살고 있잖아.”
센토의 말에 반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김빠진 소리를 내었다. 당연히 너도 여기서 살고 있으니까, 같이 사는 거지. 어서 들어와! 멀뚱히 빗속에 서 있던 센토를 끌어당긴 반죠는 문을 닫았다. 나시타 안에 들어와 귀를 때리던 빗소리가 멀어졌음에도 센토는 반죠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시타에 살던 건 신세계 전의 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이 녀석이 잠이 덜 깨서 갑자기 이곳으로 돌아와 놀라게 해주려는 건가.
“일단 돌아가. 여기 주인들이 놀랄 거라고.”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여기 주인은 마스터, 아니. 그래. 이제는 아니지만, 아무튼 미소라와 우리잖아!”
“너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모두에게 잊혀졌어!”
새삼스럽게 이걸 다시 설명하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센토는 제 팔을 잡고 놓지 않는 반죠를 보며 센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맞은 비 덕분에 몸이 차갑게 식었다. 추워. 자신이 입고 다니던 코트는 역시 있을 리가 없었다. 뒤늦게 따스한 곳으로 들어오니 거짓말같이 추위가 몰려와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게 누가 밖에서 그렇게 서 있으래. 일단 빨리 몸부터 닦아, 바보가.”
“바보가 누구보고 바보래.”
알 수 없는 말을 한 건 둘째치고 발끈해 대답하는 반죠는 센토가 알던 반죠가 맞았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느낌이다. 그제야 센토의 팔을 놓은 반죠는 잠시 기다리라며 냉장고의 문을 열고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센토가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건 한순간이었다. 냉장고로 자연스레 내려가 버렸던 반죠는 빠르게 수건 여러 장을 들고 와 센토에게로 던졌다. 자, 닦아. 빗속에 서 있던 모양과 같이 가만히 서서 냉장고와 반죠를 번갈아 보던 센토는 던져진 수건을 받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말았다.
“우왓! 센토. 야!”
“말도 안 돼. 이게 꿈이 아니고서야, 어째서 내가 예전의 나시타에?”
“앗뜨. 열이 펄펄 끓잖아. 빨리 여기 누워봐!”
“설마 타임 슬립이라는 말도 안 되는…….”
누우라는 권유를 받자마자 센토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반죠의 말 그대로 차가웠던 몸은 어느새 불덩이가 되어있었다. 힘없이 널브러진 센토의 몸을 안아 든 반죠는 아까까지의 퉁명스러움을 모두 지우고 걱정스러움을 가득 담은 채로 소파로 향했다. 조심스레 센토를 내려두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건을 가져온 반죠는 묵묵히 젖은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두면 저체온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바보같이. 툭 던진 말에 센토는 눈을 흘기면서도 반박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감기약이 있던가? 미소라를 깨우는 게 나으려나.”
“됐어. 자면 나을 거야.”
“너 진짜 엄청 아픈 것 같거든. 갑자기 늦게 돌아와서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까.”
“넌 그대로라 다행이다.”
이것도 헛소리라고 생각해. 뒤늦게 덧붙인 말에 반죠의 물음은 늘어만 갔다. 이렇게 앓아누운 센토는 처음 봤다. 알고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그런 걸 수도 있었지만, 뭐랄까.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이 들었다. 며칠 전에 들었던 충격적인 사실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설마, 자신이 카츠라기 타쿠미라는 사실을 알고 절망해 이리저리 떠돌다 비를 맞고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 키류 센토라서 괜찮다는 말을 했음에도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자기보다 바보 같은 나르시스트 천재 같으니라고. 반죠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센토의 손을 정성스레 닦았다.
“반죠.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아, 예.”
“너. 변신은 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
반죠의 말에 센토는 대략적인 날짜를 계산했다. 겨울, 반죠가 변신한 뒤이며 에볼토가 배신하고 나간 나시타. 센토 자신이 카츠라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인 것 같았다. 확실한 날짜를 물어보고 싶어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는 반죠의 입을 막는데 급급할 뿐이다. 다시 돌아온 침묵 속에서 열심히 센토를 닦아주던 반죠는 문득 마지막으로 닦아주려 들어 올린 센토의 손을 바라보며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한 번도 본적 없는 말끔한 반지를 끼고 있다. 그리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분명 제대로 된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였다. 그것도 왼손 약지에 잘 끼워져 있는 반지라니. 대체 언제? 반죠는 괜히 허탈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옷. 내 옷, 있지?”
“당연히 있지. 기다려, 가져올 테니까.”
수건을 대충 의자에 던져두고 반죠는 다시 냉장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물을 잔뜩 먹어 무거워진 수건은 금세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에 묻은 물기는 어느 정도 닦아냈어도 머리카락은 그렇지 않았다. 센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수건을 들어 올렸다. 느릿느릿하게 머리카락을 털며 눌러붙은 옷을 대충 들어 올려 벗은 그는 어서 다시 잠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센토, 이거면 돼?”
“응. 이리 줘.”
“됐고, 손들어봐. 입혀줄게.”
익숙한 옷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나온 반죠는 센토의 말을 무시했다. 환자면 얌전히 누워있기나 하지. 바지와 상의를 의자에 걸쳐두고 반죠는 속옷을 들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 정도는 나도 입을 수 있.”
“비틀대면서 할 말은 아니다?”
바지를 내리며 끙 소리를 낸 센토는 확실히 똑바로 서 있지 못했다. 어지러운 시야를 겨우겨우 붙잡아 서 있는 게 고작이던 그를 잡아 세우고 반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을 베풀어주는 중이었다. 와중에도 혼자 하겠다는 걸 보니 오기가 생긴 것도 조금은 있었다. 반죠는 반항하지 않는 센토를 붙잡고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거의 끌어안은 상태로 반죠에게 기대 앓는 소리를 내는 센토는 잡아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상태였다. 어서 입혀주고 재워야지, 열심히 바지를 입히고 상의를 뒤집어씌우던 반죠는 문득 센토의 몸 곳곳에 나 있는 붉은 자국들을 발견하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애인은 언제 생겼냐.”
“애인?”
“아, 아니 뭐. 숨기고 싶으면 그 정도는 숨겨도 돼.”
옷을 모두 입혀주고 다시 소파에 센토를 눕힌 반죠는 헛기침을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덮고 자던 담요와 걸어둔 코트를 덮어준 반죠는 빨리 자라며 센토를 재촉했지만, 정작 센토는 애인이라는 단어에 조금 정신이 들어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질투해?”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질투를 왜 하냐! 나한테는 아직 마음속에 카스미가 있거든!”
“그래, 그래.”
“뭐야 그거. 기분 나쁘게.”
센토의 긍정에 반죠는 소름이 돋는다며 제 팔을 마구 비볐다. 그 행동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던 센토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가 잠에 빠져드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세 잠들어 코를 훌쩍이는 센토를 보며 반죠는 이내 의자에 주저앉아 인상을 팍 구겼다. 역시 오늘의 센토는 이상했다. 대체 언제 애인을 사귀었으며, 심란해 보이던 그가 헛소리만을 일삼고 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애인이라니. 엄청나게 적극적인 애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온몸에 이렇게 자국을 내둘 리가 없는데. 잡생각이 가득 찬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반죠는 그렇게 한참을 센토를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잠자기는 글렀으니 어딘가에 있을 약이라도 찾아 먹여둬야겠다는 맘에 그는 카페를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 밝고, 점심이 될 때까지 센토는 일어나지 못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몇 번이고 뒤척이던 그를 계속 지켜보던 반죠는 미소라가 나와 뭐하냐는 말을 꺼낼 때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이마를 만져보며 열이 내렸는지 확인하고 괜찮아졌을 때까지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준 반죠는 생각 외로 성실하게 센토를 돌봤다.
“이 녀석. 어제 계속 비를 맞아서 그런지 감기에 독하게 걸렸나 봐.”
“센토가? 약은?”
“아. 선반에 있길래 하나 꺼내서 먹였어.”
“좋은 아침!”
반죠는 엉망으로 어질러놓은 선반을 가리키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물론 빠르게 등을 얻어맞고는 쉽사리 웃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미소라와의 투닥거림과 곧 문을 열고 들어온 사와 덕분에 시끌벅적해진 카페 안에서 센토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워.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킨 센토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퍼뜩 눈을 비비며 시선의 주인들을 쳐다보았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봐.”
“밤 새 못 봤다고 홀쭉해졌네.”
“그치? 완전 병자라고 병자. 이래서 사람은 근육을 단련해야 해.”
“물 마실래?”
한 명씩 말해. 센토는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웅얼거렸다. 열은 내렸어도 감기 기운은 그대로였다. 그의 말에 동시다발적으로 입을 다문 셋은 눈빛을 교환하면서 슬금슬금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센토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서 몸을 모은 셋은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추고 무언가를 상의했다. 이윽고 상의가 끝난 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물을 따르는 반죠와 가게 밖으로 뛰쳐나간 사와, 냉장고 아래로 달려간 미소라는 우당탕 소리를 냈다. 오히려 저게 더 신경 쓰인단 말이지. 기침을 하며 코트를 입은 센토는 얼굴을 팔로 닦고 자신의 체온으로 더워진 소파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누워 있어! 뭐 하는 거야!”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누워있을 수는 없어.”
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핸드폰을 꺼내 본 센토는 날짜를 확인하고 더는 누워있을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원래 있던 시간대로 돌아가야 한다. 과거에 어떠한 현상으로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분명 과학적인 이유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다급한 반죠의 목소리에도 센토는 그를 무시하고 기어이 바깥으로 나오고 말았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상쾌한 바깥의 공기는 환자가 맡기에는 차가울 뿐이었다. 일단은 어디로 가야 하지? 나시타는 미래의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장소였다. 그나마 관련이 있는 곳이라 한다면 그 때에 살고 있는 곳이려나. 목적지를 정한 후 오토바이를 꺼낸 센토는 코트를 여몄다.
“어디가! 같이 가!”
“넌 스매시가 나올 상황에 대비하고 있어. 나는 가야 해.”
“그러니까 어디 가느냐고 묻잖아. 환자면 얌전히 말 들어!”
“다녀올게.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있어!”
쪽. 황급히 센토를 쫓아 나와 말리던 반죠의 뺨에 스치듯 지나간 짧은 뽀뽀는 효과 만점이었다.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채로 센토를 보낸 반죠는 한참 동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센토가 내 볼에 뽀뽀하고 간 거지? 다녀온다고 친절히 얘기해주고? 장난으로 그런 게 아닌 거? 하. 하하하. 하. 하?! 그렇게 멍하니 오토바이가 떠나는 뒷모습을 볼 뿐이던 반죠는 제 뺨을 만지작거리다 뒤늦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차. 이 시간대는 아직 사귀지 않던가.”
무의식적으로 반죠의 뺨에 뽀뽀하고 와버렸다. 들려오는 반죠의 커다란 비명에 뒤늦게 깨달아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왼손에 소중히 끼고 있는 반지의 주인은 그리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겠지. 잠시 신호에 걸린 짧은 시간 동안 센토는 자신의 왼손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에 짧게 입 맞췄다.
신세계에서의 센토는 반죠와 연인 사이가 됐다. 어떻게 되었냐는 물음을 던져도 딱히 어떻게 됐다는 말을 해줄 수 없는, 그래. 둘은 자연스레 서로의 곁을 허락했다. 모든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 정도였다. 익숙한 도로를 따라 자신이 살고 있던 곳으로 향하던 센토는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
이른 아침부터 사라진 센토를 찾아 동네를 빙빙 돌길 세시간 째. 반죠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닥치는 대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센토의 이름을 대고 있었다. 이렇게 말없이 갑자기 사라질 녀석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어딜 가야 한다면 메모라도 남겼을 것이다. 젠장. 대체 어딜 간 거야.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은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던 반죠는 문득 자신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벨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반죠?”
“센토! 어디 갔었어!”
“평소에는 내가 어딜 가도 신경도 안 쓰더니.”
“내가 언제 그랬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센토는 열렬히 자신을 반겨주는 반죠가 썩 익숙하지 않았다. 묘하게 위화감이 드는 친근함이라고 해야 할까, 덥석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높은 체온에 센토는 눈을 흘겼다. 목도리와 두꺼운 코트를 껴입은 자신과 달리 반죠의 차림은 가볍기 그지없다. 아니, 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본 사람들의 옷은 모두 그랬다.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거리를 떠돌고 있던 차에 심한 두통을 느끼고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순간, 눈앞마저 핑핑 돌아 센토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숨을 고르고 나시타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거리를 걸을 때 걸려온 게 반죠의 전화였다. 달라진 계절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분명 두통에 원인이 있을 터인데, 반죠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센토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뭐, 이제 그럴 일도 없겠지만.”
“너 갑자기 왜 이래.”
“새삼 쑥스러워하는 거?”
“뭐라는 거야. 며칠 전까진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굴더니.”
“헉. 아직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어? 야, 그건 침대였잖아!”
“하아?”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같은 주제를 말하는가 싶더니 아예 다른 곳으로 빠져버리는 반죠 덕분에 센토는 없던 화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하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침대에서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고? 그건 마치 센토 자신과 반죠가 침대에서 굴러먹었다는 뜻처럼 들렸다. 언제부터 우리 둘이 그런 사이가 됐는지 모르겠는데. 틀린 점을 집어주기에는 너무 많은 부분이 틀려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악이다.
“일단 나시타로 돌아가자.”
“거길 왜 가? 집으로 가야지.”
또다시 의견이 갈렸다.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이 녀석이 태연하게 나시타가 아닌 집으로 가자고 한다는 건 다른 집이 있다는 소리였다. 감이 잡히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익숙하게 자신을 찾아다닌 반죠 류우가라는 사람. 나시타가 아닌 새로운 집을 토대로 지금 자신은 다른 시간대에 와있는 게 아닌가? 일단은 반죠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센토는 반죠의 손을 내리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스카이 월이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어디서나 보이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해. 이상한 것 투성이다.
“일단 가서 얘기해.”
“그, 그래.”
등을 떠밀어 반죠를 앞세워 걷게 한 센토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다시 들어 올렸다. 핸드폰 상의 날짜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확실히 반죠는 나시타로 가는 길이 아닌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 앞서가는 반죠가 진짜가 아닐 거란 생각을 하며 주머니 속 보틀을 꾹 쥐고 센토는 계속해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눈에 띄눈 문제없이 둘은 꽤 번지르르한 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보통의 가정집으로 보일 정도의, 오히려 둘이 살기에는 좋아 보이는 수준의 집으로 반죠는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명패는? 센토는 반죠를 따라 들어가기 전 대문에 걸려있는 명패를 확인했다.
“키류…….”
믿기지 않지만, 센토의 성씨가 적혀 있었다. 마당에 널려있는 많은 코트들과 티셔츠마저도 익숙하다. 눈을 의심하며 느리게 현관 안쪽으로 향한 그는 이리저리 널려있는 신발까지도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 거실로 들어섰다.
처음 느낀 건 아기자기함이었다.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동물 모양 인형들이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지저분하다면 지저분할 거실의 테이블에는 수식이 잔뜩 적힌 종이가 널려있다. 한 쪽에는 반죠를 위한 것인지 커다란 샌드백이 위치하고 있었다. 가벼워 보이는 스카쟌이 의자에 걸려있어, 반죠는 소파에 앉아 주위를 신기하게 둘러보는 센토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반죠. 난 카츠라기 타쿠미야. 이런 내가 밉지 않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미워해, 그리고 넌 센토야. 아까부터 뭘 잘못 먹은 것처럼 굴어 왜.”
“내가 밉지 않다고…….”
확실해졌다. 사람의 반응으로 확신을 내는 것만큼 논리에 어긋나는 일은 또 없지만, 이건 확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망설임 없이 반죠의 옆에 가 앉은 센토는 문득 어질러진 책상 위에 서류와 함께 놓여있는 액자를 들어 올렸다. 항상 입던 옷을 입고 찍은 둘만의 사진. 그리고 제 손과 반죠의 손에 끼어진 같은 모양의 반지는 센토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끼고 있나? 휙 시선을 돌려 반죠의 손을 쳐다보자 역시나 사진과 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설마 미래의 내가 근육 바보와 사귈 줄이야.”
“저기 센토. 알아듣게 좀 말해.”
“이쯤 되면 알아채라. 어떠한 현상 때문에 나는 지금 과거에서 온 키류 센토야.”
“아 그렇군. 과거의 센토였구만. ……이라고 납득할 줄 알았냐!”
진지한 표정의 센토에게 더는 따질 수 없었다. 쉽게 믿을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어도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과 같았다. 그렇기에 더욱 생각이 꼬여갔다. 간밤에 갑자기 사라져 몇 시간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 센토는 연신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죠 자신과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는 뻔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쩌겠어? 이게 사실인걸.”
“반지. 반지는?”
“안타깝게도 나는 네가 아는 지금의 키류 센토가 아니라니까? 반지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는 말을 하며 웃어 보이는 센토는 예전의 센토임을 증명하듯 반죠 앞에서 자신을 숨겼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보이는 그 모습이 썩 오랜만이다. 아! 이때의 너는 정말 곤란하다니까! 반죠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옆에 어색히 앉아있던 센토를 잡아끌었다. 갑자기 잡아 당겨진 몸이 기우뚱,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반죠의 품에 쓰러졌다. 머리를 기댄 꼴로 그에게 기댄 센토는 모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건 아니다. 결국 미래의 자신과 반죠는 사귀고 있으니까. 이런 스킨십 또한 별다를 거 없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예상외로 얌전히 반죠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는 센토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반죠의 심장 소리가 선명히 들리는 조용한 이 순간에 익숙해져 센토는 점차 웃음을 거둬들였다. 조금은 슬플지도 몰라. 계속되는 싸움의 연속에 다친다 하더라도 뛰어갈 수밖에 없던 센토가 처음으로 멈춰 섰다. 지금의 이곳은 전쟁이 끝난 평화로운 세계. 아마도 그렇겠지. 반죠 류우가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 너한테 화낸 거. 미안해.”
“그때?”
“아, 왜. 네가 카츠라기라고 했을 때. 내가 화냈잖아. 책상 다 쳐버리고. 아마 그쯤의 너인 것 같으니까.”
“신경 안 써. 내 탓이 맞는걸.”
또! 센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반죠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력히 화를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에 센토는 이어 쏟아질 반죠의 말을 기다렸다. 분명 소리를 질렀으니 불같이 이야기할 거다. 근육 바보가 할 말 정도는 예상하고 있는 바였으니까.
“바보야. 나는 네 편이거든.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
“와. 네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어? 바보는 넌데.”
그러나 예상을 멋지게 빗나간 반죠의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짧은 탄성은 순수한 감탄이다. 벌떡 몸을 바로 세운 센토는 멋쩍게 얼굴을 긁적이는 반죠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필 긁적이는 손마저 왼손이다. 미래에 나눠 가지게 될 반지가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디자인을 보아하니 분명 자신이 고른 모양이다. 어쩌면, 반죠는 좀 더 화려한 걸 하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궁금증을 넘어 어째서 미래에 도착했는가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의 평화를 즐기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 생겼다. 적어도 센토는 지쳐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이 마음에 들어.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나날을 보상받듯 몸은 편히 잠에 취해갔다. 부드럽게 머리를 헤집어 쓰다듬어주는 반죠 또한 센토가 잠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얼핏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자세였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조금 자둬. 돌아오는 건 미래의 네가 고민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태연히 센토를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반죠의 말마저도 나쁘지 않다. 복잡한 생각을 모두 뒤로한 채 눈을 깜빡이다 웃은 센토는 잠시만이라 중얼거리며 잠을 청했다.
***
원래였다면 익숙하지 않았을 길을 지나 현재, 아니. 미래에서 온 자신이 머물는 동네에 들어선 센토는 오토바이를 돌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로 지어진 집들이 많아 아직 그리 활발한 편은 아니다. 딱히 이상할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차근차근 원인을 따져 해결책을 찾기에는 자신의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센토는 앞으로 쏠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 벌어진 일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하기엔 과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다. 모든 일에는 물리적 법칙이 존재하고 그것을 따르는 게 물리학자다. 반드시 일어난 일에는 원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근처에 원인이 있을 법한데…….
“여기 좀 이상한데!”
“어디?”
“저기 봐. 저쪽 놀이터 말이야.”
“반죠?!”
여어. 따라왔다고. 뿌듯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반죠를 본 센토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말았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튀어나와 놀라게 만들었으니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코를 훌쩍인 센토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시선을 돌려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는 별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네와 미끄럼틀을 번갈아 가며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반죠가 말을 믿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신뢰가 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대충 몸을 똑바로 세워 한 걸음을 내딛은 센토는 그 순간 붕 뜨는 제 몸과 시야에 깜짝 놀라 팔을 허우적거렸다.
“내, 내려줘.”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왜 고집을 부려? 얌전히 있어!”
세간에서 말하는 공주님 안기를 당한 센토는 허우적거리던 팔로 얼굴을 가리며 무언가 불만을 중얼거렸다. 단단히 그를 안고 있는 팔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쉽사리 벗어날 수 없고, 그럴 힘도 없다. 센토는 이내 고개를 빼꼼 돌려 가까워지는 놀이터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는 이상함은 없어도 몸이 느끼는 압박감이 늘어만 간다. 마치 무언가의 경고 같았다. 이 세상의 너는 옳지 못한 존재라는 걸 말하는 듯.
“이상하지?”
“바보치고는 정확했어.”
“그런 바보랑 사귀는 건 어디의 누구시고?”
“호오. 내가 너랑 사귄다는 뜻?”
“아, 아니야?”
반죠의 목소리가 떨린 것 같았다. 확신까지는 아니어도 감은 잡았다는 듯한 말에 센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무리도 아니다. 그렇게 대놓고 스킨십을 받아들이거나 먼저 하거나. 지금의 센토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었을 걸 알고 있어 더욱 그랬다. 딱히 부정하지 않은 채 그가 제대로 말해주길 바라고 있는 반죠의 어색함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손끝에서도 전해져 왔다. 놀리는 건 이쯤 할까나. 센토는 반죠의 손등을 꼬집고 몸을 비틀어 안겨있던 몸을 자신의 힘으로 일으켰다.
“어떠한 이유 때문일까? 이 시대의 판도라 박스 때문이라는 설이 제일 유력한데. 그렇지만 미래의 신세계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내 말에 대답해!”
“사귀는 게 맞으면 어쩔 건데? 지금의 너는 날 좋아하지 않잖아?”
센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틀린 게 하나 없는 말이기에 반박할 수도 없다. 확실히 이 키류 센토와 사귀는 건 미래의 반죠 류우가지, 지금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가? 결국은 틀린 사람이 아닌데. 태연히도 뺨에 입맞춤을 건네고 가버린 걸 생각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딱히 달라지지 않은 센토의 얼굴에 자신은 그의 말처럼 성애적인 이끌림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분명 몸에 남은 자국들도 모두 알지 못하는 자신이 남긴 거겠지.
그 말에 반죠는 난색을 표한다. 그는 센토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고 있다는 게 맞다. 솔직히 인정하긴 싫어도, 뭐. 그런 셈이었다. 애초에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 곁에 있을 리가 없었다.
“좋…….”
“응?”
“좋아해! 싫지 않다고! 젠장, 아무튼 그런 거야!”
일그러진 공간을 손으로 휘저어보던 센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반죠를 바라보는 표정이 진심으로 놀라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놀랄 일이냐. 퉁명스러운 반죠 목소리에도 놀란 걸 감출 수는 없다. 그의 좋아해는 오롯 동료애를 뜻하고 있어도 이렇게 갑작스레 들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했다. 센토를 지나쳐 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그네에 주저앉은 반죠는 태연한 척 하는 얼굴과 달리 귀가 벌게져 있었다.
조금만 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센토는 반죠와 마찬가지로 그의 옆에서 흔들리고 있는 그네에 낮았다. 쇠로 고정되어 있는 그네는 차갑기 그지없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리는 놀이터 근처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하는 사람이 보일 법도 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조용한 주위는 반죠와 센토를 위한 공간처럼 보였다.
“저기, 센토.”
“특별히 대답해줄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선심 쓴다는 듯한 센토의 목소리에 반죠는 저도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어떤 말을 할지 모르겠다. 이건 반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건 질색이니까, 가장 궁금했던 걸 물어보자.
“미래의 너는 나랑 행복하냐?”
많은 뜻을 숨겼다. 자세한 일을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마음. 미래를 안다면 좀 더 손쉽게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반죠의 질문에 센토는 앞을 보며 곧 땅을 박차고 그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쌀쌀한 날씨의 바람이 머리를 헝클고 지나간다. 높게 올라갈수록 차가워지는 공기에 센토는 코가 얼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열 덕분에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기분 탓이겠지만, 무엇보다 반죠의 질문에 조급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는 것 또한 중요했다.
“행복해. 무엇보다 더.”
“다행이네. 그런 미래가 되어서.”
“네 덕분에 말이지.”
행복하다는 충족감은 모두 반죠에게서 온 것이다. 센토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끼익 거리는 쇳소리가 점차 사그라들 때 센토는 가볍게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푹신하게 깔린 모래 위에 착지해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센토는 저 멀리 빛을 내는 익숙한 벽을 등졌다. 닿지 않을 먼 거리에 있음에도 시야에 담지 않겠다는 행동. 반죠는 여전히 그네 위에 앉아 센토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잊혀졌다. 그 사실은 공허했다. 그대로인 사람들, 그렇지만 그대로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자신이 남아있다는 건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기뻐해야만 자신이 사람들을 구했다는 ‘사실’이 남아있으니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억하고 있는 하나가 남아있다면 그건 없던 일이 아니다. 키류 센토는 존재할 리 없는 외적인 존재이자 존재해야만 할 과거의 인물이었다. 홀로 남은 세상은 외로울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던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반죠는 유일무이한 사람으로 곁에 찾아와주었다. 이 정도는 가져도 된다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덧없는 세계에 떨어진 외톨이에게 남겨진 하나의 선물 말이다.
“아마 앞으로도 힘든 일이 많을 거야.”
“알려줄 생각이면 그만둬. 난 내가 직접 겪어나갈 거니까.”
“호오? 후회할 텐데?”
“그 후회가 우리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면야.”
어디로 가든 해피엔딩이면 되잖아? 말을 덧붙인 반죠는 그제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그는 속이 시원했다. 후회할 거란 말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점점 세지는 바람 속에서 둘만의 이야기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정확히는 더 이야기하고 싶어도 말소리가 전해지지 않았다. 놀이터를 중심으로 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은 이제 바람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세기로 변하고 있었다. 어째서 진작 알아채지 못했는지.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색의 가스까지 이 주위를 덮기 시작한다. 스카이 월에서 보았던 색과 같아, 위험하단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반죠! 급히 손을 뻗은 센토와 마찬가지로 그네에서 일어나 함께 손을 뻗은 반죠는 필사적이었다. 몸이 밀려나는 강한 바람에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다.
“변신해! 그럼 버틸 수 있을 거야!”
“뭐, 뭐라고?! 잘 안 들려!”
“변신하라고 반죠!”
변신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반죠는 가스 섞인 바람을 마시지 않기 위해 입과 코를 막으며 한 손으로는 보틀을 꺼내 흔들었다. 무슨 일이 있을까 허리에 차고 있던 벨트에 보틀을 겨우 끼워 넣은 반죠는 그새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센토를 알아차리고 한결 움직이기 수월해진 걸음을 옮겼다. 어딨어, 센토!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풍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그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마 자신에게 변신하라 외쳐놓고 정작 본인은 변신하지 못했다면?
연신 센토를 부르며 놀이터를 전전하던 반죠는 순간 무언가를 잡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수 없을 폭풍 같은 바람에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욕설이 절로 나올지도 모른다. 센토에 대한 걱정이 가득 차, 정신을 차리고자 온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흔든 반죠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몇 초 전까지의 가스 폭풍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끔해진 놀이터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수준으로 평화로웠다. 놀이터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면라이더잖아? 왜 저기 엎어져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보며 변신을 푼 반죠의 눈에 뒤늦게 놀이터 한가운데에 쓰러져있는 센토가 들어왔다.
“센토! 센토?!”
“뭐야……, 시끄러워. 불편해.”
“괜찮아? 안 다쳤어?”
말끔한 얼굴로 잠들어 있던 센토는 반죠의 목소리에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변신을 안 해서 다친 상태는 아닌데, 그렇다고 하기엔 방금과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표정인 센토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 잘 잤다. 반죠가 받쳐 든 상체를 자신의 힘으로 일으킨 센토가 뜬금없이 한 말이었다.
“여기서 뭐 해? 스매시라도 나타났어? 아니, 그보다 왜 내가 여기서 자고 있던 거지?”
“뭐긴 뭐야. 내가 널, 어라? 그러게?”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 일부분이 완전히 비어있다. 초조했던 걱정은 사라지고 어느새 물음만이 남았다. 그건 센토도 마찬가지인 표정이었다. 얌전히 자고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눈을 뜨니 놀이터 한 가운데인지 알 수가 없다. 멀뚱히 상황파악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둘은 갑자기 찾아온 어색함에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말하기엔 부끄러운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어째선지 서로를 바라볼 때 애틋한 마음이 차올랐다. 무슨 말을 해도 봐줄 수 있을 것 같고 사랑스럽게 볼 수 있을법한 그런 감정. 놀이터를 벗어나 주차해둔 오토바이 쪽으로 다가가 나시타에 돌아갈 때까지 둘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피하느라 급급한 나머지 속도를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다. 제대로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마른침을 삼키고 나시타의 문을 연 반죠는 순간 던져진 행주를 얼굴에 맞고 말았다.
“환자를 데리고 어딜 다녀온 거야!”
잔뜩 화가 난 미소라의 목소리에 반죠는 퍼뜩 센토가 아팠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 그랬지! 행주를 잡아 안쪽으로 다시 던져둔 반죠는 뒤쪽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센토를 잡아끌었다.
“지금 나보고 환자라고 한 거? 나 안 아파.”
“웃기지 마. 분명 어제, 아까까지만 해도 열이 펄펄 끓었는데.”
“나는 지극히 정상 체온이야. 아마도 36.7도쯤 되려나?”
일말의 망설임 없이 체온을 읊은 센토는 반죠의 손을 잡아 자신의 머리에 대게 했다. 확실히 미지근한 느낌을 빼곤 문제가 없는 체온이라 생각된다. 성큼성큼 바에 놓여있던 체온계를 들고 다가와 센토의 입에 물려버린 미소라의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열이 나면 그어버리겠다는 오오라를 뿜으며 체온계가 올라가는 걸 지켜보던 미소라는 예상외의 결과에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센토의 말이 옳았다. 열은 나지 않아, 36.7도가 정확히 찍혀있었다.
“나는 아프지 않아. 오히려 개운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수 있을 상태니까.”
“뭐. 뭐야. 우린 널 걱정해서.”
“걱정했어? 나를?”
“당연하잖아. 센토니까.”
그리고 여기는 돌아올 곳. 그렇지? 미소라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작게 끄덕이는 반죠는 머쓱하고 짧막하게 응이란 대답을 하며 헛기침을 했다. 왜 이런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따뜻해지는지 모르겠다. 무언가 많은 일이 지나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오히려 지금의 빈 기억의 일부가 센토와 같은 상태라면 녀석을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센토는 멋쩍게 웃는 반죠와 해맑게 웃고 있는 미소라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럼 평소처럼 실험 해볼까! 정의의 히어로니까 노력하자고! 생뚱맞은 센토의 말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냉장고의 문을 여는 미소라와 투덜대는 반죠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
몇 시야 지금. 잠든 센토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어주던 반죠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곤히 잠들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센토를 좀 더 편히 눕혀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반죠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어깨에 기댄 머리를 내려주고 몸을 좀 더 끌어당겨 무릎에 뉘인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이렇게까지 자기 몸에 손을 대는데도 깨지 않는 센토를 보며 반죠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간 센토의 얼굴의 많은 생채기를 깨달은 순간 반죠는 핸드폰을 볼 수 없었다.
“센토?! 어디서 다친 거야? 나 자는 새 나갔다 왔어?!”
“으, 으. 뭐. 뭐야. 반죠? 안 다쳤어?”
“무슨 소리야. 어, 설마 지금의 센토?”
지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둘은 서로의 왼손에 있는 반지를 확인했다. 잠시 잠을 잔, 정신을 잃은 새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센토는 처음 잠들었을 때처럼 반죠의 어깨에 기대 있었고, 반죠는 그가 움직였다면 바로 깰 수 있을 정도로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일단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지기보다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다. 자잘하게 긁힌 게 바닥에 쓸린 것만 같은 모양이다.
“일단 약부터 바르고 말하자.”
“흐응, 반죠한테는 과거의 내가 왔었구나?”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알지. 지금의 나라고 했는데 모르면 바보 아닐까나.”
“은근슬쩍 바보라고 했겠다!”
연고를 찾아 들고 거침없이 짜바르던 반죠의 손길에 작은 엄살을 피우며 센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변신하던 과거의 반죠가 마지막 기억이다. 아마도 크로즈 폼 덕에 별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반죠가 별 탈 없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은 과거에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였다. 앞머리를 넘겨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의 상처에도 약을 꼼꼼히 펴 바른 반죠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고 연고를 내려두었다. 예전에도 자주 다치던 얼굴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흉터는 남지 않았다. 이번에도 흉터가 남지 않길.
“그래도 다행이다. 무사해서.”
“이 천재 물리학자님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지!”
“뭐 어떻게 된 일인데?”
잘 들어! 신세계가 아닌 우리의 과거에는 스카이 월이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네뷸라 가스가 한 곳에 집중되어 라이더 활동을 하던 나의……. 신나는 설명이 시작되자 반죠는 빠르게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하며 냉큼 센토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읍읍대는 소리가 사그러들쯤에야 손을 뗀 반죠는 뚱한 표정의 센토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해봤자 난 모르거든.”
“그럴 줄 알았어. 됐고, 잊어버린 거 있잖아.”
양팔을 내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감은 센토의 말에 반죠는 아차 싶었다. 둘이 항상 하던 일을 깜빡했다. 어딘가에 다녀왔을 때, 서로가 만나지 못했을 때. 무조건 제일 첫 번째로 하는 일. 반죠는 얌전히 인사를 기다리고 있는 센토의 앙다문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를 건넸다. 익숙해질 만큼, 질릴 만큼 해온 키스임에도 센토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핥아주고 깨물어야만 혀를 허락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 길지 않은 키스를 끝내고 이마를 콩 맞부딪힌 반죠를 보기 위해 눈을 뜬 센토는 곧이어 들려온 인사에 살풋 웃고 말았다.
“어서와.”
“다녀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