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민 손을 [2017년 봄, 본편 27화 이전 시점]
‘하나야 선생님’, 주치의를 향해 환자가 내미는 손은 노이즈가 섞여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공중으로 흩어진다. 19년 동안 열심히 달려온 생의 끝이 이토록 허무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담당 환자이자 친한 친구의 후배였던 모모세 사키가 사망할 당시 그는 자리에 없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달라지는 것 없이 그는 무력하게 휘둘린다. 어느덧 배경은 비가 세차게 내리붓는 어두운 밤으로 바뀌고, 그의 실패로 완전체가 된 버그스터는 등을 돌린 채 사라진다. 그는 망가진 몸을 일으키려다 고꾸라져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친다.
동시에 그는 과거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으로 젖은 베개가 불쾌해 우선 일어나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경련하는 손을 억지로 짚다가 결국 큰 소리를 내며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등이 먼저 바닥에 닿아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는 온 힘을 쥐어짜내 겨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떨림이다. 머리가 울리도록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동안 호흡을 고르고, 협탁 위 휴지를 가져와 끈적거리는 얼굴을 닦아내고, 그리고 이불 위에서 덜덜 떨며 밤을 새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일에 한해서 체념하고 포기하는 건 그에게 있어 아주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가장 아픈 과거가 악몽으로 되풀이되어도 그는 그런대로 견뎌낼 수 있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젠장, 차라리 없었으면······.”
잠긴 목으로 저도 모르게 속내를 내뱉고서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닳고 닳은 후회와 고통에 잠겨있다 보면 결국 지나갈 밤이다. 이전과 같았더라면, 이 낡은 병원에 혼자였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같은 층 복도 맞은편 방에 그녀가 있고 그걸 그도 아는 것이 문제였다. 5년 전 그날 이후부터 그는 혼자 있을 때 어디까지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종종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낮이었다면 주변의 행인 때문에라도 겨우 현실을 붙잡고 늘어질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과거에 짓밟힌 그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타인이 간절하다. 누구라도 좋으니 곁에 있어달라고 마음 한 구석이 절박하게 비명을 질러댄다. 차라리 그녀가 없었으면, 언제나처럼 혼자였더라면. 입술을 짓씹으며 참으려 해봐도 고통스러운 심장은 그에게 지금이라면 가능할 선택을 강요한다. 결국 그는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다리가 자꾸만 힘이 풀려 어둠 속에서 복도 벽을 짚은 채로 걸었다. 평소보다 거의 두 배의 시간을 들여 그녀가 지내는 병실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다시 한 차례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여전히 살려달라고 발악하는 마음 한 부분에게 똑같은 목소리가 차갑게 비난한다. 여기까지 와서 뭘 할 건데. 들어가서 자는 애 깨울 것도 아니고, 이 밤중에 멋대로 방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니코 입장에서는 두렵고 불쾌할걸. 그는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열이 있는 것처럼 어지러워 기운을 차릴 수 없다. 이대로 조금만 있다가, 아주 조금만 쉬다가 방으로 돌아가야지. 어두운 시야로 자꾸만 방금 전의 꿈이 어른거려 질끈 눈을 감는다. 기다렸다는 듯 들릴 리 없는 목소리들이 섞인다. ‘무리하지 마세요, 선생님.’, ‘예전의 너는 이런 무리는 하지 않았는데.’, ‘정신 차려, 타이가!’ 그는 알고 있었다. 다시는 볼 수 없고, 용서를 빌 수도 없는, 자신이 어리석고 무모했던 탓에 놓쳐버린 사람들.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멍청한 친구 하나 살리겠다고 몸을 던져 발악하던 의사였다. 이제 갓 대학교에 입학하여,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켜주고 싶다던 상냥한 사람이었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애초에 내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지 않았을 텐데. 이제 와서 아무 소용없는 후회라는 걸 알아도 현실에서조차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무력감이 죄책감에 녹아 그의 목을 틀어막고 호흡을 빼앗는다. 그렇게 가야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신 죽을 수만 있었다면 수 천 번이라도 그리 했겠지. 면목도 없이 살아남은 죄로 그는 과거에 갇혔다. 그라는 삶은 모든 현재에 있어 죽은 것보다 못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진다.
“타이가, 타이가!”
어깨를 무자비하게 흔드는 손길에 그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복도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을 그마저도 등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녀이다. 자신이 얼마나 이 곳에 주저앉아 있었는지, 그녀가 왜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건지, 왜 이토록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는 건지 의식이 파편처럼 흩어져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저 무릎을 꿇은 탓에 바닥에 닿은 그녀의 맨 다리가 차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언뜻 들었다. 그의 뺨에 그녀가 오른 손을 가져다댄다. 아주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정신 차려, 타이가.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니, 별로···.”
“별로는 무슨,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놓고! 안되겠다. 지금 당장 병원에 전화할게.”
“그만 둬.”
그녀가 휴대폰을 가지러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가 황급히 그 손목을 붙잡았다. 따라 일으켜진 그의 몸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휘청거린다. 그녀는 더욱 더 기겁을 했지만 그는 이번에야말로 제정신을 차렸다. 떨리던 손도 어느새 거짓말처럼 얌전하다.
“별 일 아냐. 나도 내 방 갈 테니 너도 들어가서 자라.”
“진짜 괜찮겠어? 응급실에라도···.”
“내가 의사인데 뭐 하러.”
면허가 없어서 못 믿겠냐는, 한결 가볍게 뒤따르는 목소리에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풀린다. 곧장 뒤를 돈 그는 올 때보다 훨씬 안정적인 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향하다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따라오던 작은 발소리도 덩달아 잦아든다.
“진짜 괜찮다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고집스러운 눈을 하고 있을지 빤해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 수 없이 그대로 다시 걸음을 옮기자 또 타박타박 그녀가 따라붙는다. 결국 그녀는 그를 따라 그의 방 안까지 들어갔다. 그는 다시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돌아보았다. 예상한 그대로의 까만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인다.
“돌아가서 자.”
“싫어,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자는 동안 타이가 죽으면 어떡해?”
“넌 무슨 말을······.”
사뭇 진지한 태도로 하는 소리가 엄청나다. 그는 결국 두 손을 들며 벽걸이에 걸어놓은 백의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니코는, 그가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매트리스로 향하자 기함을 했다. 그가 제대로 눕기 전 다급하게 이불 대용의 옷을 뺏으며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지금 환자는 너잖아. 왜 네가 거기에 누워?”
“그럼 어떻게 하게. 널 바닥에서 재우랴?”
“아, 됐어. 일단 누워봐.”
백의를 매트리스 위로 던지고는 그의 손목까지 꽉 붙잡고 끌어당기는 걸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 그녀는 그가 순순히 침대에 누울 때까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저를 보는 서슬 퍼런 눈이 말 안 드는 환자를 감시할 때의 그것이라 그는 기분이 묘했다. 이제 만족했냐고, 제발 그만 가서 자라는 말을 세 번째 꺼내려던 그는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좁아도 몰라. 빨리 자.”
한 사람이 적당히 누울 침대에 굳이 올라타 옆에 떡하니 누워버린다. 행여 그녀가 아까 저처럼 떨어질 걸 염려한 그가 황급히 벽으로 붙으며 일단 자리를 만들어주자,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는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병원을 쳐들어왔을 때, 그리고 캐리어를 들고 스스로 방을 선택하여 눌러앉았을 꼭 그 때의 웃음이다. 어서 침대에서 내려가라고 해봤자 코웃음이나 칠 것이었고, 그렇다고 저 가는 팔을 붙잡고 방 밖으로 끌고나간 후 재빨리 문을 걸어 잠가봤자 밤새 방문을 두드려댈 게 빤하다. 설령 오늘 밤은 지나간다 해도 내일 날이 밝았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일지 짐작하기 싫었다. 이도 저도 못할 상황에서 그에게 남은 길은 하나였다. 그는 베개와 이불을 절반 이상 내어주고, 그녀가 좁지 않게 몸을 최대한 벽에 붙인 채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손을 뻗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다시 눈을 떴지만 개의치 않고 그 손 그대로 어깨를 다독이면서, 환자를 재우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뻔뻔히 대꾸하였다. 그의 의사를 무시한 것 치고 손길은 또 아주 조심스럽다. 그녀의 의중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 그는 혼란이 빠졌다. 상대가 천재 게이머에 제 멋대로이기 그지없는 사이바 니코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조금만 객관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보자, 곧바로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여자아이와, 한밤중에, 같은 침대에 누운 것도 모자라 그녀가 토닥이는 손길을 받고 있다. 이게 뭐냐, 하나야 타이가. 네가 인생을 글러먹긴 했어도 나이 스물 아홉 먹고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하여 그 충격으로 한참 말문을 잃었다가 그가 겨우 입을 연다.
“뭐하는 거냐. 그만 해.”
“됐으니까 빨리 잠이나 자. 그래야 나도 잘 거 아니야.”
“너 진짜!”
“내 고집을 아직도 몰라?”
언성을 높이고 눈을 아무리 치켜떠봤자 왜, 뭐, 왜. 입은 댓 발 내밀고 답하는 모습에 머리가 아파 그는 결국 모든 걸 포기했다. 어느새 악몽을 꾸었던 건 일주일 전쯤으로 느껴질 만큼 까마득하다. 이걸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몸과 정신이 함께 지쳐서 그는 도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아주 조용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두 눈을 감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지금도 그의 어깨를 가만가만 다독이는 소리, 귓가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규칙적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가끔씩 조그만 움직임에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낯설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오랜 시간을 홀로 지새워 이제 자신의 반경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기억이 흐릿한 오늘에 와서, 그녀는 영문을 모를 만치 커다란 안식을 준다. 그는 그녀를 억지로라도 내쫓지 않는 것이 스스로의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결코 타인에게 내보이지 않았을, 되지도 않는 어리광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지쳐있었고, 죽지 못하였으니 살아야 했고, 그 외의 살아있는 존재가 간절하였으므로 더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뒤척거리는 것을 멈추고, 이불로 덮인 가슴께가 점차 느리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줄곧 어르던 손을 거두었다. 조금 벌어진 입술에서 나오는 숨이 편안한 것을 보니 더 이상 악몽이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제야 뒤늦은 안도가 새어나온다. 깜짝이야, 사람 놀라게 하고. 누가 봐도 혼자서는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고서 나는 방으로 돌아가라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의 눈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행여 그의 잠을 방해할까 아주 세심하게 넘겨주며 그녀는 입속으로 열심히 툴툴거렸다. 이후 그의 곁에서 설핏 잠에 들었다가, 오전 5시를 넘어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복도 유리창 밖으로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2. 잡았던 [소설 마이티 노벨 X 다음 해인 2024년, 니코의 고백으로 사귀게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
이주일 간의 휴식을 마치고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밤새 그의 옆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재잘대던 그녀는 정작 아침이 되자 졸음에 겨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와 비슷하게 잠들었지만 훨씬 일찍 일어난 그는 익숙하게 그녀의 캐리어를 챙기고 축 늘어진 그녀를 준비시켰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조수석에서 내내 골아 떨어진 모습도 아쉬워서 그는 운전 중 틈만 나면 옆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모를 이야기였다. 어찌되었든 아침부터 서두른 덕분에 수하물을 부치고 나서도 탑승까지 넉넉한 시간이 남았다. 시럽을 잔뜩 넣은 캬라멜 마끼아또를 한입씩 크게 마시며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마셔보라며 내밀어진 그녀의 것을 한 모금한 그는 황급히 자기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딱 예상한 반응에 그녀는 소리 내 웃었다. 문득 하고 싶었던 말이 생각났다.
“타이가, 밤에 무서우면 시차 신경 쓰지 말고 꼭 전화해.”
“무서울 일이 뭐가 있어, 내가 애도 아니고.”
“왜? 갑자기 천장에서 유령이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니코.”
“아니면 악몽 꿀 수도 있잖아. 뭐가 됐든.”
즉시 튀어나오려는 그의 반박을 그녀가 손을 잡아 말렸다. 내가 옆에 있으면 이렇게 손이라도 잡아 줄 수 있을 텐데.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꽤나 진지하다. 그는 덩달아 이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악몽을 꿨을 때 네가 달래준 적도 있었지.”
“오, 기억하네? 나만 아직도 생각하는 줄 알았어.”
“그걸 잊어버릴 리가.”
“그치. 우리가 처음으로 한 침대에서 잔 날인데.”
“말이 좀 이상하잖냐···. 그런데 정말 어떻게 거기서 내 옆에 누울 생각을 했어? 그때 그렇게까지 편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돌이켜보았을 때 의아했으나 딱히 끄집어 물어낼 자신도 없어 줄곧 지나치다 보니, 어느덧 7년도 더 된 물음이다. 그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폐병원의 모습과 그때의 밤공기를 아주 잘 떠올릴 수 있다. 당사자인 그보다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답을 주는 대신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 사실 네가 악몽으로 힘들어 하는 걸 본 게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어. 이건 몰랐지?”
“뭐? 처음이 아니었다고? 그럼 또 언제?”
“잘 생각해봐. 다음에 귀국할 때 알려줄게.”
곤란한 얼굴을 하고 황급히 이전의 수많은 기억을 되짚는 사람에게 미안하게도 그는 모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지금 와서야 환자를 대할 때 외에도 꽤 다정하게 웃을 줄도 알고 말투도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사실 처음 니코가 찾아갔을 당시 그는 늘 날을 세우고 있었었다. 속마음을 완벽하게 숨기고, 주변 모두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그에게 한 발짝 더 나아갈 엄두를 내게 된 계기가 바로 그 날이었다. 처음 보는 약한 모습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을 때, 그토록 절박하게 마주잡아오던 순간을 아마 그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샤트를 내놔라, 가면 라이더는 나 혼자로 충분하다. 퉁명스러운 말투를 한 꺼풀 벗기면, 읽을 게 없는 나만 싸우면 돼. 여기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홀로 남아 괴로워하는 그가 있었다. 본인이야 그래도 괜찮다는 헛소리를 하겠지. 그러나 그녀는 저를 붙잡았던 손아귀의 힘을 기억한다. 그런 시간이 있었다.
어느덧 그녀가 타야할 비행기의 탑승 수속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린다.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다 마신 일회용 커피 잔 두 개를 버리고 돌아왔다. 그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크게 안는다. 함께 지나온 시간에 비해 낯선 품이 그렇게 좋아서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가볼게!”
“그래.”
“······ 저기, 언제 놔줄 거야?”
“······.”
“보내기 싫어?”
“응. 아니···, 응.”
행여나 자신의 미련이 그녀의 발목을 잡을까, 떠나야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줄까 하는 무수한 망설임이 보인다. 몇 년 전 그녀를 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일부러 차갑게 등을 돌렸던 것에 비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대답이다. 늦게나마 변화한 그와 그런 그를 포기하지 않은 자신이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뿌듯함을 담아 그의 목에 팔을 감자 그가 눈치껏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다. 찡그리지만 않으면 유순하기 짝이 없는 눈매에 그녀는 장난스럽게 키스했다.
“다녀올게, 타이가.”
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춘다. 사랑을 넘어서 거의 경이에 찬 행동이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늘 믿기지 않는 존재였다. 비록 지금 바다를 건너 떠나더라도, 저 작은 인사 하나로 그의 마음을 현재에 단단히 묶은 것과 같이. 한때 완전히 포기했었던 미래가 그의 손에 닿았다.
3. 처음 [2017년 초봄, ‘1’ 이전 시점]
그의 방문은 언제나처럼 조금 열려있다. 그녀가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이유를 물었을 때, 혼자 지내는데 닫아놓을 필요가 있냐는 싱거운 답이 돌아왔었다. 그런 사람이 덧붙여 너는 문 꼭 잠그고 자라고 신신 당부하는 게 우스웠었지. 지금에 와서 별로 도움 안 되는 기억이라 그녀는 애꿎은 고개만 두어 번 흔들었다. 고민에 빠진 와중에도 문 틈 사이로는 계속해서 소리가 새어나온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저 오늘따라 이유 없이 한밤중에 눈이 떠졌고, 왜 이 큰 건물에 냉장고가 겨우 하나냐고 투덜거리며 부엌 용도로 쓰이는 병실로 가 마른 목을 축였고, 그리고 돌아와서 바로 다시 잠들 예정이었던 그녀는 복도를 가로지르다 그대로 멈추어 섰다. 입을 다물고 아픔을 참는 듯 한 앓는 소리가 한 번, 그리고 무언가 벽에 부딪히는 이질적인 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침대가 벽과 딱 붙어있는 구조라는 걸 떠올림과 동시에 그녀는 그의 방문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낮과 달리 낯선 밤공기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내부가 그녀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혹시라도 소리가 멈추기를 기대하고 숨을 죽여 본 그녀는, 탄식처럼 또다시 터져 나오는 아픈 신음에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문턱을 넘어 조심스럽게 그가 누워있는 침대 맡으로 다가간다.
“타이가?”
그가 내는 소리가 맞았다. 벽 쪽에 닿은 그의 무릎이 몸을 움츠릴 때마다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저러면 아픈데, 멍이 들 텐데. 아무것도 해결 못하는 염려들만 그녀의 머릿속을 맴돈다.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것으로는 깨지 않고, 여전히 무언가에 짓눌리듯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그는 찬찬히 살펴볼수록 상태가 심각했다. 식은 땀 때문에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하며, 두 눈을 감은 채 마찬가지로 굳게 닫은 입은 윗니가 아래 입술을 너무 강하게 짓누르고 있어 아파 보인다.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괴로운 신음 역시 그녀가 겁을 집어 먹게 만들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답지 않게 당황한 탓에, 그녀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사나운 꿈자리 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깨우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분기점 앞에서 다시 한 번 망설인다.
내가 깨우면 싫어하려나? 물론 미움 받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당연하지, 그런 감정 하나하나에 행동을 주저할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이 병원에 눌러앉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길 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여태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 만큼 본인에 대한 모든 걸 감췄다. 얼마 전 뭘 하다 왔는지 다쳐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에겐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응급처치를 하다가 우연히 방에 들어갔던 그녀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더랬다. 척 봐도 꽤 심한 상처에 저도 모르게 문 쪽으로 붙으면서도 입으로는 도움이 필요하냐고 그녀가 호기를 부렸을 때, 그는 일 없다고 대꾸하며 덤덤히 치료를 계속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도움이 실제로 필요한 순간에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녀를 밀어냈다. 그래서 그녀도 그녀대로 태연하게 그 거절을 무시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나가보라는 말에도 굳이 그의 손에서 붕대를 뺏어 조금 더 등의 상처에 잘 고정되게끔 거들었던 것처럼. 그러니 지금 망설이는 것은 그가 이런 모습을 저에게 들킨 후, 문을 걸어 잠그고 앞으로 더욱 거리를 두려 할 것이 미리 짜증이 나서였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국 한발 물러났다. 지금은 이대로 지켜보다가 상태가 더 심각해지면 그때 어쩔 수 없이 깨우는 것으로 스스로와 합의를 본 것이다. 그녀 본인의 잠은 어느새 몽땅 달아나버려서 오래 있을 심산으로 주변 의자 하나를 침대 옆으로 끌고 왔다. 그의 상태는 크게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여전히 계속 몸을 뒤척이고,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연이어 떨어지고, 이정도 되면 스스로 깨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짐작도 안 간다.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그가 내보이지 않고 숨기는 현재 뿐이었다. 그 전의 과거가 생각보다 아플 수 있겠다는 걸 그녀는 오늘 와서 어렴풋이 느낀다.
그가 한 번 더 미간을 잔뜩 찡그린다. 이불자락을 움켜진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진다. 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싫어하든 말든 고통에서 일단 끌어낼 때가 온 것 같았다. 어깨를 잡으려다 그녀는 작은 변덕으로 자기 쪽에 가까운 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조심스럽게 겹쳤다. 그리고 힘을 주어 그를 깨우려는데 예상치 못한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그 쪽에서 그녀의 손을 움켜쥔 것이다.
너무 놀라 그녀는 손을 떼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잠에서 깬 것인가 싶어 얼굴을 살펴도 여전히 두 눈은 단단히 감겨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그대로 굳어있자니, 그녀는 문득 한 가지 변화를 발견했다. 그의 표정이 이전보다 풀려있다. 착각인가 싶어 상체를 기울여 가까이에서 살펴도 정말이었다. 꽉 맞물려있던 입은 어느새 조금 여유 있게 떨어졌고, 찡그렸던 눈썹도 풀렸다. 호흡도 이전보다 훨씬 가라앉아서 이마에 송골송골한 땀방울만 아니면 평범하게 잠든 걸로 보이기까지 한다.
"와, 진짜······."
허탈함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탄식하다가 그녀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겨우 찾아온 안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 이왕 잘해주는 거, 그와 자신의 손가락이 단단히 겹쳐지도록 잡힌 손을 꼬물거렸다. 그리고 위로 드러난 그의 손 등을 남은 손으로 가만히 다독인다. 그는 다행히 깨지 않고 얌전하다. 그녀는 긴장감이 풀린 고요 속에서 지금 이 상황을 곱씹었다. 손을 잡는 행위가 그에게 도움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깨어있었다면 이런 행동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괴로움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 그를 짓누르는 고통의 일부나마 목격한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질문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중요한 중간 고리 하나가 빠졌다는 것을 알지만, 그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녀로써는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무심하고 가혹한지, 또 그만큼 얼마나 타인에게 이타적인지. 과거에 그가 겪지 말았어야 했던 모든 비극과 이후 혼자서 오롯이 견디어온 5년간의 지옥이 어떠하였는지, 그리하여 도움이 절실해도 맨 정신으로는 남의 옷깃 한 번 붙들지 못할 만큼 망가져버린 그의 현재 그 모든 것을 그녀는 아직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의미 없는 고민을 우선 중지하고 한 시간 가량 더 그의 손을 잡아주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최대의 호의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