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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llow time

  *2018 특촬 컾링 합작 ‘모오 아이시카나이!’ 참여 – 블레이드 켄자키x하지메
  *착의 상태의 성적접촉에 관한 묘사 및 관계에 대한 암시 있음
  *개인 캐해석 및 뇌피셜 기반 설정 다수

 

 

 


  투명한 유리컵 속 레모네이드가 줄어들어 간다. 켄자키는 파란 빨대를 입에 문 채 앞을 응시했다. 테이블 바로 건너편에 앉은 하지메가 켄자키와 똑같이 레모네이드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 눈이 마주쳤다. 빨간색의 빨대를 놓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연인은 “왜?”라고 물음을 던졌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곤 시선을 돌렸다. 
  그저 일 년 중에 지나가는 날들 중 하나인, 특별한 날은 더더욱 아닌 오늘. 창밖으로 보이는 토요일의 늦은 오후 거리에는 연인들이 즐비했다. 손을 맞잡거나 다정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걷는 연인들. 그 또한 오늘만큼은 가면라이더가 아닌, 거리의 연인들 중 한 명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레모네이드를 마신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내봤을 법한 평범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분위기가 다른가. 어째서 이렇게 어색한가.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연인들이 한 음료에 두 개의 빨대를 꽂은 모습이 창문에 비치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레모네이드에 집중하는 척 하며 자신의 연인을 곁눈질했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빨대를 문 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그만 갈까?”
  얼마 못 가 바닥을 드러낸 하지메의 레모네이드가 눈에 박혔다. 어쩐지 아픈 기분을 느끼며 켄자키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밖으로 나온 뒤에도 분위기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손을 잡기는커녕 가까이 붙어 서지도 않은 채 길을 걷고 있다. 나란히 함께 걷고는 있지만 연인사이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간격이었다. 그는 괜히 잔머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걸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주말 외출 약속을 잡는 데 성공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정식으로 사귀게 된 이후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였다.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인다운 말이나 행동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 이 상황은, 서로 모르는 사이의 행인 둘 같다. 켄자키는 애써 진정하려 노력하며 미리 생각해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둔 장소와 생각해둔 말. 준비했던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있지, 하지메. 하지메도 액세서리 안 할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의심 섞인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보았다. 검지와 중지에는 은빛 반지가, 손목에는 파란 팔찌가 매여 있었다. 스페이드가 각인된 사각반지가 반짝거렸다.
  “그…… 생각해봐. 타치바나 씨도 다이아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다니잖아. 무츠키도 거미가 그려진 손목 보호대를 끼고 있고. 어때?”
  하트가 새겨진 바지 체인이나 반지를 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부러 목소리를 한 톤 높여 살갑게 덧붙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매정했다.
  “싫다.”
  켄자키는 침착하게 기억을 되짚었다. 약속에 나서기 전에 그는 분위기에 난조가 보이면 이를 수습할 수 있을 법한 방법을 약 일곱 가지 정도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수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도 잡지 않고 텅 비어 있는 손이 유난히도 춥게 느껴졌다.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하지메를 액세서리점 안으로 데려오고 나서야 켄자키는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사지 않아도 괜찮으니, 자신을 따라 구경만 해도 좋으니 제발 함께해달라고 열심히 부탁했다. 졸라도 보았다. 그러나 하지메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자리에 굳어버린 것만 같던 하지메의 발걸음을 움직인 것은 아마네였다. 아마네에게 목걸이나 팔찌를 선물해 주면 좋아할 것이라고 구슬리자, 그제야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네를 향해 들리지 않을 감사와 사과를 전한 켄자키가 하지메의 옆에 나란히 섰다.
  대형 액세서리점은 아니었다. 그저 거리에 종종 보이곤 하는, 작은 가게였다. 그럼에도 이곳을 켄자키가 자주 찾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트럼프 카드를 모티브로 한 액세서리가 이곳에 유독 많았다. 보드에 입사했을 때 블레이드가 스페이드를 상징한다는 말에 이곳을 찾았다. 선배인 타치바나에게 선물할 액세서리를 찾을 때도 이곳에 들렀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 이곳을 찾게 된 지도 거의 일 년이 되어 간다. 켄자키는 남모를 정감 같은 것을 느끼며 진열대로 다가섰다.
  그가 기대한 대로 진열대는 트럼프 카드의 네 표식을 새긴 액세서리로 가득했다. 스페이드와 클로버, 다이아, 그리고 하트. 그는 하트가 늘어선 곳에 서서 눈을 크게 떴다. 하트라는 표식의 특성 상 귀엽고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많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연인이다. 몇 번을 보아도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고, 그의 눈에 연인은 이것들보다 훨씬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액세서리를 고를 땐 객관적이어야 했다. 어울리지 않는다면, 누가 보아도 예쁘게 잘 맞는다고 생각될 만한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켄자키는 신중히 액세서리들을 살폈다.
  “하지메.”
  어느 목걸이 진열대에 멈춰 있던 하지메가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 살펴보니 일반적인 목걸이들보다는 확연하게 줄이 짧았다.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는 니켈 성분과 도금을 피한, 어린이용 목걸이라는 홍보 문구가 벽에 붙어 있었다. 아마네에게 금속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만일을 위한 것일까. 여전히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에게만은 다정한 이였다. 그 세심함에는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메의 손에 조심스레 쥐어져 있는 로켓 펜던트에서 그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잠깐만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줄래?”
  켄자키는 빠르게 자신이 원래 서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하지메가 천천히 다가오는 동안 그는 진열대 구석의 반지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액세서리보다 좀 더 날카로운 느낌으로 하트가 새겨진 반지가 호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메의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감촉을 떠올리며 손가락의 크기를 가늠하려 애썼다. 단 한 번 잡아본 것으로 뭘 얼마나 가늠할 수 있겠나 싶지만, 깊이 고민한 끝에 반지 하나를 빼어들었다. 노란 물을 입은 나뭇잎들이 꽃처럼 흩날리던 가로수길에서 마음을 전했을 때 좀 더 열심히 잡아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왼손 내밀어봐. 맞는지만 볼 테니까. 응?”
  그 말에 하지메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급박히 사더라도 자신이 낸다며 수습하자 조금은 누그러진 시선이 날아왔다. 켄자키는 하지메의 왼손을 잡았다. 피부가 맞닿으며 전달되는 온기가 낯설면서도 따듯했다. 그는 연인이 어느 손을 주로 사용하는지 기억하는 이였다. 자주 쓰는 손의 검지에 끼워주려면 왼손에 끼우는 것이 맞으리라. 반지의 구멍을 손가락에 맞춰, 조심스레 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는 반지를 뺄 수밖에 없었다. 반지가 손가락보다 작았다. 한두 수치 더 큰 호수를 끼우면 맞을 듯 했다. 그렇지만 분명 이 크기면 맞을 것이라 확신했다. 반지가 두 번째 마디에서 걸린 모습이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최대한 느릿하게 빼내었다. 동시에 하지메의 손가락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어딘가에 분명 맞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하나 오랫동안 살피던 그는, 곧 답을 찾았다.
  약지였다. 왼손 약지. 검지보다 딱 한두 호수만큼 더 얇은 손가락. 저곳에 끼우면 정확하게 맞으리라. 그렇지만 저 손가락은 왼손 약지였다. 얼굴에서 묘한 열이 느껴졌다. 고작 반지를 끼우는 일인데, 심하게 긴장한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그는 검지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반지를 약지 앞에 가져다 놓았다. 끼워주고 싶다. 이왕이면 도금된 은색 반지가 아니라 진짜 은반지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그러나 당장 눈앞에 놓인 유혹이 그를 뒤흔들었다. 데이트라고는 믿기지 않는 데이트를 하고 있어도 일단은 연인 사이이니 괜찮지 않을까.
  켄자키는 하지메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매끄럽게 밀려들어간 은색 반지가 하지메의 약지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반짝임에 묻혀 끊어질 듯한 이성을 붙잡으며 곧장 반지를 빼낸 그가 외쳤다.
  “저, 저기. 계산 좀 해주세요!”

  하지메는 열쇠를 꺼내들어 능숙하게 하카란다의 문을 열었다. 혹시 늦게 돌아오게 된다면 사용하라고, 하루카가 건넸던 예비 열쇠였다. 불이 꺼진 하카란다의 안으로 들어선 하지메는 통로 쪽의 불을 켰다. 카운터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만이 주홍빛으로 어스름하게 밝아 왔다. 얼마 남지 않은 크레이프를 입 안에 밀어 넣은 하지메가 크레이프를 감싸고 있던 종이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려던 하지메는, 카운터에 선 채 제 모습을 쫓는 켄자키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시간이 늦었다. 가서 자라.”
  켄자키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헤어지려던 것이 아니었다. 이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박자로 움직였다. 오래 가지 못하고 금방 다 마셔 버린 레모네이드. 그에 이어 하트가 새겨진 은빛 반지가 그의 눈에 박혔다.
  “……응, 알았어. 안녕.”
  발걸음이 무거웠다. 깊고 깊은 물속을 억지로 나아가는 기분. 그는 자신이 보낸 데이트를 떠올렸다. 점심 즈음에 만나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곧 영화관으로 향해 흔해 빠진 사랑 영화를 보았고,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연인에게 액세서리를 선물하곤, 연인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돌아가는 길이 조금이나마 더 길어질 수 있도록 바이크에서 내렸다. 시내를 벗어나 도시 외곽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바이크를 끌며 걸어왔다. 이유는 크레이프였다. 그는 폐점 직전의 가게에서 크레이프를 샀다. 그리고 이를 망가뜨리지 않고 바이크를 몰 자신이 없다고 투정을 부리자, 연인은 못 이기겠다는 듯이 걸어 주었다. 그럼에도 해는 빠르게 저물어갔고 어느덧 완연한 밤에 이르렀다. 오늘따라 시간은 왜 이리 빠른 것만 같으며, 모든 것이 순조로우리라 믿었던 하루는 엉망이 되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켄자키.”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부름에 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메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하, 하, 하지메?”
  “뭐냐, 그 반응은. 뭘 생각하고 있었나.”
  그 말에 켄자키는 쓰게 웃었다. 첫 데이트를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해 침울해하고 있었다곤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메야말로 무슨 일 있어?”
  하지메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천천히 뻗어 온다. 조금씩, 그의 앞으로. 그의 뺨을 향하는 듯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손을 떨기 시작했다. 조명이 어두운 다홍빛이어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뺨을 감싸주려는 것일까. 그가 고른 반지를 낀 손으로 뺨을 감싸고 다정한 말을 건넬까. 켄자키는 그 손에 뺨을 부비고 맡기는 것이 옳을지, 자신도 똑같이 뺨을 감싸주며 키스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 고민했다. 난색의 조명 아래서 하지메의 입술이 연붉은색으로 빛났다.
  이윽고 손이 바로 근처까지 가까워졌을 때, 켄자키는 눈을 감아 버렸다. 너무 긴장해버린 나머지,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눈을 떴다.
  그가 눈을 감은 동안 아무 일도,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메는 그의 뺨을 감싸지도, 그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물론 켄자키가 하지메의 연붉은색 입술에 입을 맞추는 일 또한 없었다. 그는 망연히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잊어버릴 뻔 했다. 다시 문을 잠가야 해.”
  정말로, 이렇게 끝인가?
  “그리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날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켄자키는 하지메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미안, 하지메.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어. 들어주지 않을래?”

  켄자키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무릎 위에 손을 얹은 모습이 다소곳했다. 일단 방 안까지 들어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긴 했으나, 무엇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형광등을 끄고 침대 옆의 수면등을 켜둔 채 창의 블라인드를 열자 달빛과 주홍빛 불빛이 섞이며 위층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어슴푸레한 빛을 냈다. 문을 닫은 방 안에서 조용히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내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하지메가 쏘아붙이듯 입을 열었다.
  “또 네 사사로운 일들에 엮여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아.”
  그 말에는 다소 울컥했는지, 답하는 켄자키의 목소리가 감정적이었다.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말할 건 없잖아.”
  “그러는 너는,”
  이어진 말은 몹시 무감각했다.
  “왜 그렇게 나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 하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그는 연인의 손에 고이 자리 잡은 반지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정말로 사랑을 의미하는 반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서로의 시간을 나눠 가진 증표로서 끼워져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중요한 게 당연하잖아. 나는 네가…… 네가 좋으니까. 첫 데이트였는데…….”
  “데이트?”
  그가 한껏 우울해진 얼굴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그 얼굴이 그를 적잖이 속상하게 했다. 그러나 그 얼굴 또한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의 얼굴이었기에, 켄자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평범하고 인간다운 데이트가 하고 싶었단 말이야. 같이 밥을 먹고 영화관에 갔다가, 카페에 들러 음료수를 마시고, 걸어서 집까지 바래다주는, 그런…… 사사로운 시간을 네게 알려주고 싶었어.”
  사사롭지만 소중한 시간이야. 마지막 말은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갈 듯이 작았다. 시계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한참 울려 퍼진 뒤에야 하지메는 입을 열었다. 
  “그것이 인간의 방식인가?”
  이런 시간들 속에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다니.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들이 지나가며, 하지메가 켄자키의 감정으로 가득 찬 두 눈을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군.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만.”
  “그건…….”
  켄자키의 파란 눈동자 안에 온갖 감정이 뒤섞여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제 겨우 감정이라는 물이 웅덩이를 이루기 시작한 하지메의 붉은 눈은 메마른 땅이나 다름없었다. 켄자키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차마 똑바로 마주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아직 전부 다 알려준 게 아니니까…….”
  순간 하지메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의아함과 흥미의 중간선에 놓인 눈빛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그는 우물쭈물하며 조금씩 하지메의 곁으로 붙어 앉았다. 오래도록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무릎 위에만 놓여 있던 그의 손이 연인의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액세서리점에서 느꼈을 때보다 더욱 낯설고 어색한 감각이었다. 그 어떤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닌, 그저 손을 잡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맞닿은 손.
  “일단, 손을 잡아.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걷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식이지. 그러면 뭐랄까, 조금씩…… 간질간질한 기분이 든다고 해.”
  연애 경험이라고는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멋모르고 여자아이를 좋아해봤던 기억뿐이다.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애가 이 사랑을 알았겠나. 게다가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반이 갈라져 버렸는데. 그러나 스물두 살의 그 역시 제대로 된 데이트라는 것에는 처음 발을 내딛은 초심자에 불과했다. 오늘을 위해 급히 ‘데이트에 성공하는 백 가지 방법’ 따위의 시답잖은 책이나 순정 로맨스 영화를 조금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탓에 단정조로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알 것도 같았다. 한 침대에 나란히 앉아 손을 맞잡고 있다. 서로 다른 온도를 품고 있던 체온이 맞닿으며 점차 하나의 온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켄자키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다음에는…… 눈동자를 마주보는 거야. 그냥 보고 있기만 하면 돼. 그러면 눈 속에서 상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분명.”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짙은 붉은색의 눈동자는 더욱 깊고 신비스러운 색을 내었다. 켄자키는 두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날, 은행나무들 아래서도 이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혈을 연상케도 하는 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비정하게만 보일 듯한 눈동자로 사랑을 이야기했다. 종과 시대를 뛰어넘어 제게 밀려오는 감정의 실체를 알고 싶다고 했다. 인간의 애정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하지메의 손을 조금 더 꼭 쥐었다. 하지메의 손은 켄자키가 잡아본 그 어떤 손보다도 따듯했다.
  “정말이군.”
  “으, 응? 뭐가?”
  “알 것 같단 말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주인을 떠나 있던 넋을 되찾아오며 켄자키가 뒤늦게 되물었다. 하지메는 저 또한 켄자키의 손을 꼭 쥐고는, 손의 방향을 틀어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아직 알려주고 싶은 것이, 하고 싶은 것이 더 남아 있다. 그렇지 않나.”
  그 말에 켄자키의 어깨가 크게 놀란 듯 들썩였다. 몸이 들썩이는 와중에 오로지 그의 손만이, 연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어 꼭 잡은 손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괜히 빙빙 돌려 말하지 마라. 왜 그렇게까지 망설이지?”
  전부 들켰다. 그가 망설이고 고민하며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헤매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연인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이 아래의 감정들도 발견하고 말았는지. 순간 켄자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얼굴이 뜨거워졌다. 뺨이 따가울 만치 달아올라 있었다.
  “……괜찮겠어? 정말로?”
  눈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붉은 눈이 정말로 그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이 느껴졌던 탓이다. 알아차렸을까, 두 뺨과 볼을 매만지고 싶다고 생각한 일이나 마른 입술을 적셔주고 싶다고 생각한 일 따위를. 손을 마주잡고 깍지를 끼는 것도 좋지만 이 손으로 어깨와 허리를 붙잡아 끌어안기를 더욱 원했다. 품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고…….
  “위층의 아마네를 깨우지만 않는다면.”
  켄자키는 하지메의 뺨을 감싸며, 다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치 다급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러나 사고는 곧 멎었다. 저항 없이 열린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자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오로지 온기만이 느껴졌다. 밤공기에 서늘하게 식어 있던 온몸을 덥히듯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가 생각했던 대로 하지메의 입술은 표면 곳곳이 튼 상태의 마른 입술이었다. 그는 입술을 삼킬 듯이 입을 맞추다가도, 차오르는 숨을 들이마실 때는 부드럽게 표면을 핥아 주었다. 마른 입술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조금씩 촉촉하고 매끄럽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는 뺨을 감싸던 손을 어깨와 허리로 뻗었다. 그대로 한 번에 하지메를 끌어당기자,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하지메의 머리가 들리며 목이 길게 늘어졌다. 상체의 무게중심 또한 그에게 쓸려가, 거의 몸을 기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때? 이젠 좀 두근두근해진 것 같아?”
  하지메는 그의 가슴께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숨이 꽤 모자랐는지 두 뺨이 선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솔직히, 그는 걱정했다. 괜찮은 키스였는지 그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첫 키스를 이렇게 거칠고 다급하게 해버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상할 만치 빠르게 뛰는 이 가슴을 더는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오랫동안 로맨틱한 분위기를 쌓은 상태에서 하는 것이 좋다던 연애 지침서들의 내용은 이미 저 멀리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아니, 아직 모르겠다만.”
  어쩐지 조금 장난기가 밴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웃으며 다시 한 번 하지메의 입술에 키스했다.

  “일어나라, 켄자키.”
  “싫어, 조금만 더 잘래…….”
  켄자키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다. 하지메는 침대 옆 스탠드로 다다가가 수면등을 껐다. 등이 없어도 충분히 밝은 시간이 와 버렸다. 달빛 대신 막 고개를 내민 햇빛이 방 안을 눈부시게 감싸고 있었다. 밤중에는 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마저 보고야 말 수밖에 없는 시간. 하지메는 침대 주변 바닥에서 베이지색 코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코트와 마찬가지로 널브러져 있던 파란 티셔츠나 청바지로부터는 눈을 돌렸다. 주워든 코트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채로 밤을 보내고 사정없이 구겨진 모습이었다.
  “있지, 하지메. 그…… 반지 말인데.”
  이불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작았다. 이불에 막혀 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인지, 그가 작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앞으로도 계속 차고 다녀주면…… 안될까?”
  하지메는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반지가 손가락을 옥죄는 듯이 갑갑해졌기에 코트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것을 기억했다. 반지를 꺼내어 켄자키가 제게 했듯이 약지에 천천히 밀어 끼우자, 반지구멍이 손가락과 예쁘게 맞물리며 손가락을 감쌌다.
  “호, 혹시 싫다면 억지로 낄 필요는 없어. 다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네게 무언가를 해준 적이 얼마 없는 것 같아서. 뭔가를 선물한 건 이번이 처음이고, 그래서…….”
  이 기억을 소중히 해주면 좋겠어. 그리 덧붙인 그는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조심스러운 부탁이라기보다는 부탁과 그에 관한 변명을 들은 듯 했다. 하지메는 침대 끝으로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것도 인간의 사랑 방식 중 하나인가?”
  “으응, 아니. 이건 조금 달라.”
  곧 침대 시트를 짚고 있던 하지메의 왼손 위로 다른 손이 겹쳐졌다. 스페이드가 새겨진 반지를 지난 밤 내내 끼고 있었던 손이었다. 반지를 빼지 않고도 잠들 수 있을 만큼 길들여진 손. 그는 하지메의 손등이며 손가락 위를 더듬어 반지를 찾아냈다.
  “이건 내 방식이니까.”
  하트와 스페이드, 서로 다른 곳에 새겨진 서로 다른 문양이 나란히 같은 선상에 놓였다. 맞물릴 리 없는 것들이 이 순간만은 맞물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메는 켄자키의 손을 맞잡았다.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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