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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마이티 노벨 X 다음 해인 2024년, 니코의 고백으로 사귀게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    
* 타이가는 본인 병원 때문에 일본에, 니코는 연말 일정 때문에 미국에 있는 상태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아침이다. 일본행 비행기가 뜨기까지 한나절 가량을 남겨두고, 니코는 깊은 절망에 빠져있었다. 모든 걱정의 원인이 그녀 본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 공항 게이트는 통과해야 하는데."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니 피부의 열기 탓에 손바닥이 후끈거린다. 혼잣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목이 잠겼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잔기침이 기분 나쁘게 터져 나온다. 의사면허가 없는 그녀가 봐도 명백한 독감이었다.

사실 불길한 조짐은 이번 주 시작부터 있었다. 월요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며 미세한 감기 기운을 느낀 그녀는 그 즉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를 했다. 옷을 더 따뜻하게 입었고, 집 안 온도를 높였고, 병원에 다녀온 다음 취소할 수 있는 일정은 모두 미룬 채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크리스마스 연휴를 망칠 수 없다는 굳은 다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유명 디저트 카페, 레스토랑, 가고 싶었던 전시회, 화려한 일루미네이션까지. 전부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일본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와 함께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전화로 연휴 계획을 짜는 내내 단 한 번도 그에게 말한 적 없지만, 그녀는 이번이 그와 연인으로서 함께 맞는 첫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이 못내 설렜다. 그러므로 절대 감기 따위에 이 모든 걸 놓칠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막지 못한 절망 앞에서, 그녀는 미리 싸둔 캐리어의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비행기만 타면 다 끝날 일이야. 일본에 가면 또 어떻게든 되겠지, 뭐. 

슬슬 나갈 채비를 하며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는데 별안간 휴대폰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아 그녀는 황급히 전화부터 받으려다가, 발신자를 확인하고 우선 심호흡과 함께 목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화면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타이가."
"뭐야, 너 감기 걸렸어?"

꼭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지. 나름 티를 안 내려 한 노력이 무색하게 그는 인사만으로도 정곡을 찔러온다. 그러나 그를 더 걱정시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치미는 기침을 꾹 눌러 담았다.

"별거 아냐. 그냥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그래."
"별거 아니기는, 목소리가 완전히 잠겼는데. 언제부터 아팠어?"
"오늘 아침부터라니까?"
"니코."
"... 월요일부터 감기 기운이 있기는 했어."
"아니, 그럼 왜 진작 말을 안 한 거야. 아프면 바로 알려줘야지."
"왜, 말하면 오게?"

말 안 듣는 자기 환자가 못마땅한 그의 표정이 눈에 선해 키득거리면서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별안간 휴대폰 너머가 묵묵부답이다. 그녀는 이 어색한 침묵 속에서 미세한 타자 소리와 마우스를 딸각거리는 소리를 잡아내고 기겁을 했다.

"아 됐어, 오지 마! 미쳤어?"
"나 참, 언제는 오라며."

"그거야 그냥 얼굴 보려던 핑계였지. 지금은 어차피 내가 곧 일본 갈 건데 뭐하러 미국까지 와?"
"아픈 몸으로 어떻게 비행기를 타겠다는 거야. 고집부리지 말고 쉬고 있어. 타지에서 혼자 아프면 서럽다."
"아니, 혼자 아프면 서럽다는 것도 아세요, 하나야 타이가씨?"
"뭐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거 있어? 사갈게."
"와, 대놓고 말 돌리는 것 봐."

그 후 몇 번 더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그는 완강하게 자기 의견을 고집했다. 일본행 비행기표 취소해줄 테니까 자기가 갈 때까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자고 있으라고. 한참 바쁘게 울리던 키보드 소리가 더는 나지 않는 걸 보니 표를 이미 구한 듯했다. 그녀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패배를 인정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겨우 몇 분 서서 통화를 했다고 힘이 빠져서 견딜 수가 없다. 참담한 현실이었다.

 


***

 


 일방적인 통화가 끝난 후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그는 기어코 바다를 건너와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침대에 파묻혀 있던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알아서 잘 들어올 거라 짐작하며 비척비척 방 밖으로 나가니, 예상대로 그가 현관 안쪽에 서 있었다. 어깨에 살짝 쌓인 눈을 쓸어내는 손이 발갛게 터 있다. 두 눈이 마주치자, 미안한 마음에그녀는 인사보다도 먼저 그에게 달려갔다.

"잠깐, 안지 마. 추워. 잠깐만!"

그는 황급히 한기가 도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얇은 긴 팔 차림이 되어서야 그녀를 잡아주었다. 이윽고 크고 서늘한 손이 이마를 짚는다. 그것만으로도 아픔이 반쯤 가시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이 들었다.

"열이 생각보다 있네. 약은 먹었어?"
"응…. 근데 거의 다 떨어져서 내일 다시 한번 병원 가려고."
"같이 가자."

그는 짐을 내려놓은 후 가장 먼저 그녀를 침대에 도로 앉히고 진찰부터 했다. 목 상태를 확인하고는 많이 부었다며 작게 한숨을 쉬고, 몸살 기운은 없냐고 물었다가 그녀가 고개를 젓자 그나마 안심하고. 마지막으로 챙겨온 체온계로 열을 제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그 모든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파서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확실히 느껴지는 주치의의 애정에 그녀는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왜."
"아니, 그냥."

그는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후 그가 오면서 사 온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약까지 먹은 그녀는 다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야 했다. 좀 더 자두라며 커튼을 치고 머리맡을 지키고 있는데 별다른 수가 있나. 낮인데도 어둑한 방안에서 간간이 손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얕은 호흡 소리가 그녀를 감쌌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는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조금 나아진 몸 상태에 그녀는 이불을 두르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있던 그가 옆으로 움직여 곁을 내어준다. 코코아가 마시고 싶다는 말에 그가 자신의 것까지 두 잔을 타와 다시 자리에 앉자, 그녀는 편하게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머그잔에서 달달한 향기가 올라와 코끝에 닿는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아…. 전시회가 제일 아쉽네. 완전 인기 많은 거였는데."
"그래도 네 말대로 에그제이드한테 표 넘겼으니 아예 쓸모없게 된 건 아니잖아."
"그래, 뭐. 뽀삐랑 잘 보러 갔겠지."
"둘이 보러 가?"
"뭐야, 몰랐어? 걔가 표 줄 사람이 빤하지."

그는 정말 처음 알았는지 코코아만 홀짝거린다. 그녀는 뜨거운 음료는 잘 못 먹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 더 식기를 기다렸다. 

"일본은 눈 왔어?"
"안 왔어. 오히려 여기가 눈 오더라."
"여기서 크리스마스를 지낼 줄 알았으면 집에 트리라도 하나 사둘걸."
"내일 내가 하나 사 올까?"
"아냐, 굳이 나가지 마. 생각해보니까 일루미네이션도 좀 아쉽다."
"내년에 또 보러 가면 되지."

마지막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다. 이제는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미래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고작 내년에 일루미네이션 보러 가자는 말에 이렇게 안도하고 있다는 걸 네가 알까, 알겠지. 아니까 지금 저렇게 양심 찔린다는 표정을 짓는 거잖아. 괜히 심술이 나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꾹꾹 찔렀고, 그는 면목이 없는지 순순히 얼굴을 내어주었다. 그녀는 이내 그의 품에 아예 더 파고들다시피 몸을 기댔다. 그는 그녀가 졸린 것으로 생각하고 어깨를 가만가만 다독였다.

"들어가서 자자. 아프면 자야지."
"싫어. 12시 넘어야 잘 거야."
"그건 어디서 나온 고집이야?"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12시 넘어갈 때 너한테 메리 크리스마스 하기 전까진 억울해서 못 자."
"무슨 새해 인사냐…."

어이없어하면서도 결국 그는 순순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요즘 그의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부터 아까 미처 다 이야기하지 못한 에무와 뽀삐의 사이까지 온갖 소소한 이야기들이 둘 사이를 오간다. 창밖은 밤새 내리는 눈 때문에 평소보다 환히 빛나고 있었다. 문득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12시가 지난 것을 보자마자 그녀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타이가."
"메리 크리스마스."

디저트 카페, 전시회, 레스토랑, 일루미네이션까지. 그 거창한 모든 계획의 끝에는 사실 아주 소소한 바람이 있었다. 하루가 바뀌는 순간 가장 먼저 너에게 인사하고 싶었어. 계획한 바를 이루어 뿌듯한 마음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난 그와 같이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먼저 침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침대 끝으로 흘러내린 이불자락을 잘 챙겨 그녀가 춥지 않게끔 단단히 덮어주었다.

"이제 진짜 잘 거지?"
"응. 머리 아파…. 아니, 어떻게 하루종일 자도 졸리지?"
"아플 땐 다 그렇지, 뭐. 베개 편하게 해줄게, 머리 잠깐만 들어봐."
"자장가 불러줘."
"부를 거 같냐."
"애인이 아픈데 그런 것도 못 해줘? 하다못해 캐롤이라도 불러줘야 할 거 아냐."
"… 팔베개해줄게. 그걸로 봐줘."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이미 반쯤 잠에 취해있었다. 그가 팔베개를 해주기가 무섭게 그녀는 새근거리며 잠이 든다. 그는 내일 티라미수라도 사 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파도 크리스마스인데, 케익 하나는 먹어야지. 연휴 계획이 전부 틀어진 것에 비해 그녀가 많이 상심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더 그녀가 곤히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잠을 청했다. 나쁘지 않은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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