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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속의 아이들
W. KINA

*2018 특촬 크리스마스 합작 참여
*아마존즈 시즌 2 후반 스포일러

 

 

 

  “치히로, 치히로.”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 슬플 만큼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치히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치히로,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벌써 해가 높이 떴잖니. 그렇게 덧붙이며 눈앞의 이는 웃었다. 순간 치히로는 눈을 크게 뜨고 깜박임조차 잊었다.

  “……엄마?”

  나나하의 손이 치히로의 뺨에 닿는다. 여느 때와 같은 긴 옷자락이 팔을 따라 흘러내리듯 움직였다. 나나하가 소매 끝으로 치히로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니?”

  치히로가 생각했던 것은 꿈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꿈이 아니기에 더욱 잊고 싶었던 기억. 안 좋은 꿈보다 한참은 더 잔인하고 괴로운 기억. 나나하의 걱정 어린 시선이 마주쳤다. 치히로는 다시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손으로 대충 닦았다. 

  “으응, 아녜요. 잠이 덜 깼나 봐요.”

  잠옷을 갈아입거든 거실로 나오라는 말과 함께 나나하가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치히로는 긴장이 풀린 듯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낯선 천장, 낯선 방, 낯선 침대.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는 옷 또한 낯선 것이었다. 강아지 그림이 패턴으로 찍힌 이런 잠옷을 입어본 적은 평생 동안 없었다. 창문 너머로 햇빛이 비쳐들어 방은 따스하면서 밝았다.

  “치히로 녀석, 웬일로 늦잠을 다 잤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크리스마스 파티잖아. 기대라도 하다 늦게 잔 거 아냐?”
  “오옷, 그럴지도! 역시 나나하 씨는 뭐든 다 안다니까.”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만은 낯설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과 자신이 죽인 사람의 목소리였다. 파르르 떨려오는 제 양 어깨를 감쌌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건 꿈이다. 꿈이 아닐 리 없다. 조금 있으면 식사 시간이라며 4C의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러 올 것이었다. 곧 깨어나게 될, 환상에 불과하다. 치히로는 책상 위에 놓인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곤, 밖으로 나갔다.

  “치히로! 메리 크리스마스다!”
  “……응, 메리 크리스마스.”

  치히로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진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따스함뿐이었다. 그는 머리에 루돌프의 빨간 뿔 머리띠를 차고, 코에는 빨갛고 작은 솜뭉치를 붙여 두었다. 회백색이 아닌 눈으로 선명히 자신을 바라보며 살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치히로는 진을 마주보며 웃어 주었다. 꿈에서 깨는 순간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부 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거실은 갖가지 파티용품들로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오색빛깔 풍선들이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문구의 커다란 메시지 카드가 놓인 트리가 눈길을 끌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거실을 빙글빙글 돌던 치히로는 얼마 못 가 테이블에 주저앉았다. 평생 마주해본 적 없는 화려함과 눈부심이었다. 시선 둘 곳을 잃어버린 듯이 눈앞이 어지러웠다.

  “야! 치히로!”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그것이 치히로의 시선을 현관문 너머로 고정시켰다.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던 나나하가 친구들이 벌써 도착한 것 같다며, 나가 보라고 치히로의 등을 떠밀었다. 현관 앞에 서서 문의 잠금장치를 풀며 치히로는 되새겼다. 친구. 친구라니. 

  “오는 길에 이유를 마주쳐서, 같이 걸어 왔어.”

  열린 문 너머에는 히로키가 서 있었다. 그러나 치히로의 시선은 그 옆에 선 소녀에게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소녀는 이유라고 불렸다. 갈색의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치히로를 향해 웃었다. 상냥한 빛의 까만 눈동자, 둥글게 휜 눈매. 들어본 적 없는 밝은 목소리로 소녀가 웃었다.

  “치히로, 메리 크리스마스!”

 

***


  둥그런 빵 위가 흰 생크림으로 뒤덮인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발 같은 모습에 치히로는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생크림이 묻어남과 동시에 발자국이 찍힌 것 마냥 크림이 푹 파였다. 이유가 그 모습을 보곤 “다 만들고 먹어야지”라며 타박을 주었다. 치히로는 얌전히 테이블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잠시 스쳐간 이유의 팔에는 팔찌가 없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해?”
  “으, 응?”
  “아까부터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하잖아.”

  히로키가 냉장고에서 꺼내 온 딸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유가 플라스틱 칼로 크림을 한창 바르는 중인 케이크와 그 위에 놓일 딸기가 나란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치히로와 히로키에게 요리 쪽의 특기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달걀노른자를 풀어 설탕과 섞거나 온갖 재료를 조달하는 일을 했다. 다 같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 세 사람의 계획-치히로는 기억하지 못하나-이었고, 이유는 이 팀의 셰프인 셈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크림에 묻지 않도록 머리를 넘기며 이유는 눈앞의 케이크에 몰두했다.

  “혹시 케이크를 걱정하는 거야? 맛없을까봐?”

  그 말에 이유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손동작이 멈추었다. 이유는 빵 칼을 든 채 히로키를 째려보았다.

  “에이, 치히로가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잖아!”

  치히로를 향해 돌아온 이유의 시선은 “그렇지?”라고 묻는 듯 했다. 치히로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이유가 웃어 보이며 다시 케이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치히로는 문득 그 너머의 벽을 응시했다.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이유, 히로키, 그리고 치히로 자신. 세 사람이 같은 교복을 입고 웃는 사진이었다. 배경의 학교에는 커다랗게 ‘노자마고등학교 제 15회 입학식’이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걸린 채였다. 
  찍은 적이 없는 사진, 살았던 적 없는 집, 본 적이 없던 미소. 치히로는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진 듯이 행동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눈물이 날 것이었기에. 자신이 현관에서 노랗게 빛나지 않는 눈으로 다정하게 웃는 이유의 어깨를 붙잡고 울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언뜻언뜻 이유에게서 나는 향취를 맡을 때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했다. 꿈속의 이유에게선 다른 누군가의 피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소한 빵 냄새가 엷게 배어 있는 이 향취가, 금세 흐려질 듯 아득한 이 향이, 인간 호시노 이유의 향취일 터였다. 이유는 인간이었다. 

  “좋아, 이제 데코만 올리면 되겠다! 치히로, 히로키! 딸기 반으로 잘라서 준비해줘!”

  그리고 이곳에선 치히로 또한, 인간이었다. 

  “응, 알았어!”

  치히로는 두 팔의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찌가 끼워져 있지 않은 팔은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팔찌가 없어 옷이 달라붙지 않는 까닭이었다. 이렇게나 편안하고 자유로운데. 과도를 손에 쥐며 딸기의 꼭지를 자르고 반으로 갈라내었다.
  이유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 있었다. 남은 생크림을 짤주머니에 넣고 케이크 표면에 크림을 짰다. 치히로가 딸기를 반으로 자르면, 히로키가 이를 가져간다. 이유가 동그랗게 크림을 말아 올리면, 그 위로 히로키가 잘린 딸기를 장식한다. 한창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동안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히로키가 그 침묵을 깨었을 때는 이미 남은 딸기가 없었다. 

  “이제 이걸 올리면 되나?”

  히로키가 손에 든 것은 작은 초콜릿이었다. 케이크 장식용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문구를 그려 파는 초콜릿. 이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초콜릿이 케이크 한가운데 올라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장식했다. 이유가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완성!”

  치히로는 이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세 사람이서 다 함께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 해맑은 웃음이 절로 얼굴에 떠올랐다. 케이크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누군가와 즐겁고 기쁜 일을 축하하기 위해 있는 음식이었으므로.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입장이 되었을 때 치히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생전 경험해본 적 없는 순간에 가슴이 떨렸다. 

  “치히로!”

  다만 너무나 가슴이 떨렸던 나머지 치히로는, 다른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눈빛 대화를 읽지 못했다. 히로키가 치히로를 부르고, 치히로는 히로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을 신호탄 삼아, 이유가 치히로의 얼굴에 케이크를 들이밀었다.

  “이야, 이거 엄청나네! 역시 호시노 선생님의 딸이야.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와중에 목소리만이 들려 왔다. 곧 시야가 걷히며 뭉개진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와 히로키, 그리고 진과 나나하가 치히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찍혔냐며 두세 번 되묻는 히로키를 향해 캠코더를 들고 있던 나나하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이유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핫, 미안해, 치히로. 이게, 실은…….”
  “다 같이 케이크를 완성하면 네 얼굴에 엎기로 짰거든. 그쵸?”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는 진과 나나하가 웃어 보였다. 모두 치히로를 보고 웃고 있었다. 어떠한 슬픔이나 분노도 드리우지 않은 얼굴들이, 치히로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크림으로 얼룩진 속눈썹 사이에 보이는 그것들은 너무나 낯설었다. 비단 속눈썹에 크림이 묻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라, 치히로? 우는 거야?”
  “아, 아니. 이유. 그게 아니라…….”

  끝내 억누르지 못한 눈물들이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맺혀들었다. 눈물과 크림이 뒤섞여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흐릿한 시야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유가 비쳐 보여, 치히로는 급히 소리쳤다.

  “누, 눈에 딸기가 들어갔어!”

  눈에 어떻게 딸기가 들어가느냐며 히로키가 웃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 눈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는 것은 오직 웃음뿐이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순수하게 기쁨과 즐거움만을 담은 웃음이 어울렸다. 할 수 있는 한 커다랗게 웃어 보이며 눈물을 삼켰다. 입술에 묻은 크림도 함께 삼키자 입 안으로 단 맛이 퍼졌다. 맛있었다.
  맛있었다.
  치히로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것이 케이크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치히로는 얼굴에 묻어난 크림이며 입가의 위액을 모두 물에 털어 흘려보냈다. 세수를 마치고 쳐다본 거울 속의 자신은 한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더 이상은 토해낼 눈물도 없었다. 화장실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도 불은 켜져 있지 않았으나 거실과 부엌은 푸른빛으로 밝았다. 달빛이 커다란 베란다 창에서 푸르게 비쳐들고 있었다. 달빛은 텅 빈 집 안을 구석구석 비추었다. 언제 뭉개졌었냐는 듯 말끔히 정리된 케이크, 여러 색으로 빛을 내는 전구를 매단 트리,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문구의 커다란 메시지 카드.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 그 모든 것이 빛났다. 치히로는 테이블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이유의 집이다. 치히로 자신이 상상해 왔던 이유의 집. 
  이 모든 것은 환상이다. 이유는 이 집에서 살해당했다.
  달다고 느끼고, 더 먹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케이크도, 메시지 카드도, 꽃다발도, 선물도, 트리도 어쩌지 못할 추위가 몰아닥쳤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트리에 매달려 있던 장식용 볼이 굴러 떨어졌다.
  먼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부드러운 종소리 속에 치히로는 소리 죽여 울부짖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시내의 밝은 불빛이 천천히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테이블에 엎드린 채 머리를 감싸자 어떤 빛도 시야를 덮치지 못했다. 감싸 안은 자신의 팔에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입으로 케이크를 먹고 단 맛을 느꼈을 때와 같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기억 속에는 잊고 싶었으나 잊지 못한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테이블에서 빵 냄새 대신 피 냄새가 들끓었다. 동시에 아주 맛있는 냄새가. 
  치히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냄새가 너무 가까웠다. 

  “……이유?”

  이유는 웃지 않았다.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두 눈과 마주치자 또 한 번 다리의 힘이 풀릴 뻔 했다.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 두 눈동자의 색이 서로 달랐다. 치히로는 식탁을 붙잡은 채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누군가는 감정을 잃어, 누군가는 감정이 넘쳐흘러 만들어진 침묵이 테이블 아래로 침잠했다. 
  한참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치히로를 이유는 내려다보았다.

  “치히로. 아파?”
  “응, 아파. 너무 아파…….”

  그 말에 이유가 쪼그려 앉았다. 순식간에 자세를 낮추며 홱, 하고 바람 소리가 났다.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이질적인 두 눈으로 치히로를 유심히 관찰하다, 결론을 내린 듯 일어섰다.

  “이상 확인 불능.”

  당연했다. 작전을 수행하거나 전투를 하지도 않았고, 눈에 보이는 출혈이나 외상 또한 없었으므로. 치히로는 제 가슴팍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눈물자국으로 옷이 얼룩져 축축했다.

  “그게 아니야, 이유. 그게 아니야……. 여기가, 여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그것은 고쳐지지 않을 내상이었다. 가슴 깊숙이 새겨진 상처. 통증에 몸부림치는 이 순간 들려오는 종소리가 야박했다. 성야의 종소리는 다정했고 아름다웠다. 곧 종소리를 따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긴 긴 해가 다가고 어둠이 오면
  오색 빛이 찬란한 거리거리에 성탄 빛
  치히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든 다정함이, 부드러움이 목을 조르는 듯 했다. 호흡이 괴로웠다. 어서 이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크리스마스가, 제게 주어지지 못할 축복이 지나가야 했다. 무엇을 해야 깨어날 수 있을까.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라도 찧어 본다면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테이블 끝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려올 즈음, 치히로는 다른 노랫소리를 들었다.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마음껏 즐기자…….” 

  이유가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 사이, 작게 벌어진 틈으로 여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순간 치히로는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 크리스마스이브에…… 화요일이 크리스마스라 학교 온 게 뭣 같아서, 혼자 빵이나 먹으러 학교 옥상에 올라갔거든. 그런데 거기서 이유를 봤어.’
  이유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그러나 분명히 노래하고 있었다.

  “맑고 흰 눈이 새 봄빛 속에…… 사라지기 전에.”

  ‘시내에서 캐럴을 엄청 크게 틀어두는 바람에 음악 소리가 학교까지 들렸는데, 그 소리를 따라서 친구들이랑 노랠 부르고 있더라고. 아는 척을 해볼까 하다가도, 너무 즐거워 보여서 건드리기 좀 그랬어.’
  치히로는 다급히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유, 이 노랠 알고 있어?”

  이유는 노래를 멈추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치히로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베란다 창 너머 불빛이 이유의 뺨을 희게 밝혔다. 이유에게 이 순간이, 크리스마스가 닿아 있었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치히로는 이유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달렸다. 이유 역시 그 손을 꼭 움켜쥐곤, 치히로의 속도에 맞춰 나란히 길을 달렸다.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아파트를 지나치고 4C 청사를 지나쳐 가는 동안 아무도 소년과 소녀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바람처럼 내달려, 시내를 향했다. 종소리가 들리는 다정한 곳으로. 밝은 빛 속으로. 

  “이유, 이것 좀 봐! 눈이야!”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이 거리를 희게 비추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시내는 눈발에 휩싸여 더욱 밝아 보였다. 마치 그곳에 모든 빛이 있는 것처럼 환하고 찬란했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한겨울이 왔다
  소년소녀가 달린다. 
  썰매를 타는 
  어린애들은 
  해가는 줄도 모르고
  노랫소리는 점점 커졌고, 두 사람은 입을 맞춰 캐럴을 불렀다.
  눈길 위에다 
  썰매를 깔고 
  즐겁게 달린다
  찬바람이 입맞춤한 뺨은 붉었고 입술 새에선 쉴 새 없이 흰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럼에도 치히로는 계속 노래했다. 
  마침내 트리 앞에 다가섰을 때, 아이들은 달음박질을 멈추었다. 시내의 크리스마스트리는 무척이나 거대하고 화려했다. 자신들의 키의 몇 배는 될 듯한 나무가 온갖 장식과 전구를 달아 빛나고 있었다. 그 나무 앞에 아이들은 아주 작고, 또 작아 보였다.
 
  “이유, 우린 인간이야.”

  그러나 비단 아이들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 꼭대기에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작아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간이든 건물이든 개미든 무어든 별 반 다를 것 없이 아주 작아 보일 것이라고. 가장 높은 곳을 장식한 별 장식을 올려다보았다. 금빛의 별은 까마득히 먼 곳에 있었으나 그곳에서 분명히 빛나고 있었다. 별은 저곳에서 매년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지켜보았을까. 치히로는 이유를 향해 돌아섰다. 이유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트리를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치켜든 고개가 위를 응시하듯 보였다. 같은 별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꼭……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다시 이곳으로 오자. 인간으로서.”

  그러나 그저 이유의 두 눈에 이 찬란한 풍경을 담아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치히로는 제 머플러를 이유에게 감아 주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찬바람을 한껏 맞은 이유의 뺨은 연한 붉은빛이었다. 추위를 느끼기에 뺨이 붉게 변한다면 그것은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믿음으로 가득 들이찬 가슴 속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현실에서, 이런 커다란 트리 앞에 서면 이유도 분명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리라 믿었다. 이곳을 둘러싼 웃음, 즐거움, 행복. 그 모든 것을.

  “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이유도 인간을 포기하지 말아줘.”

  이유가 있다면 이 빛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기만을, 이 꿈이 깨기만을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좋을 듯 했다. 더 이상은 숨이 막히지 않을 것 같았다. 가슴을 꽉 채우도록 숨을 쉬고, 입이 아플 만큼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유가 치히로의 손을 붙잡고 있다면, 치히로가 이유의 손을 붙잡고 있다면, 인간일 수 있었으므로. 치히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약속이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던 이유는 환히 웃었다. 그 미소를 떠올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유에게 다시 한 번 그 웃음을 돌려주려면 살아야 했다. 언젠가 이곳의 모든 풍경을 전할 수 있도록 살아야 했다. 이유의 손을 붙잡고 더 멀리, 4C도 아마존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곳까지. 그곳에는 커다라면서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으리라. 분명 이런 모습으로.
  성탄 빛이 만연한 거리에서 아이들은 손을 맞잡고 캐럴을 부를 것이다. 추운 겨울이 가기 전에 마음껏 웃음꽃을 피우며, 맑고 흰 눈이 새 봄빛 속에 사라지기 전까지 춤을 추리라. 그 순간은 분명 누구 하나 빠짐없이 모두가 행복한 순간이 되겠지. 거리를 감싼 불빛들이 두 사람을 밝게 비추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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