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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야는 너무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서 찌뿌둥해진 몸을 일으켜 세우며 멀찍이 있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앉아있었다는 자각은 없었는데 시간은 벌써 저녁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의 근육을 풀어주자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숙직실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키리야는 자신도 제법 나이를 먹긴 먹었다고 중얼거리며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힐끔 바라본 노트북 화면은 그야말로 멀끔한 백지 같은 상태였고, 새하얀 화면 위에는 글자입력커서만 조용히 점멸하고 있었다. 기존에 쓰던 논문은 이미 완성해서 위생청에 제출한 상태였고, 이제 지금까지 겐무코퍼레이션과 함께 개발해온 백신에 대한 논문을 슬슬 적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보이는대로,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키리야는 노트북을 거칠게 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 한켠이 꽉 막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얇은 셔츠자락을 흔들며 지나갔다. 버그스터는 온감과 냉감 모두 느낄 수 있었지만 정작 그에 따른 생체반응은 나타나지 않는 신기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바람이 서늘하다는 건 알지만 그로인해 오한을 느끼지는 않았다. 인간의 몸은 체온을 빼앗기면 전신의 근육을 움직이게 해서, 즉 온몸을 떨게 해서 열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버그스터는 그런 시스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버그스터의 몸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것들 투성이였다. 가장 처음 작성했던 논문도 자신의 신체를 바탕으로 연구한 버그스터의 생체적 기능에 대한 논문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버그스터 바이러스를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근절하기 위해서는 우선 버그스터라는 존재를 먼저 알아볼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공복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감을 느끼고 생각을 하고 마음이 있지만 심장이 뛰지 않고 체온은 차가웠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존재, 그야말로 패러독스(paradox) 그 자체였다. 어째서 카미가 버그스터를 신인류라고 칭했었는지 알법한 대목이라고 생각하며 키리야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웅성거리던 소리의 진원지는 병원 현관 쪽이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뒤통수와 병원 복도를 거닐다가 몇 번 정도 마주친 기억이 있는 풋풋한 얼굴들이 한데 모여서 무슨 얘기를 그리도 재밌게 하는지 재잘재잘 떠들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단연 눈에 띄는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키리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름을 부를까 하다가 그냥 동기들과 좀 더 어울리도록 놔두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 키리야는 그들에서 시선을 돌려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병원 자체가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다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꽤 멋들어져 있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벌써 크리스마스인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한껏 들떠있었다. 어느 샌가 거리 한복판에 생겨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꼬마전구를 몸에 휘감은 채 형형색색으로 물든 거리의 가로수,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롤까지. 온 마을이 1년에 단 한번뿐인 대명절을 준비하느라 들썩이고 있었다. 키리야는 창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정확한 가사는 모르지만 귀에 익을대로 익은 캐롤을 적당히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평범하고 조용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키리야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넷북을 집어 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주변으로 노이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렌지 빛으로 빛나는 파티클이 키리야의 몸을 휘감았다고 생각한 찰나 작은 바람이 불었고, 그 순간 키리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창가에 남아있던 몇 개의 데이터 조각 역시 아주 잠깐동안 남아서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다가 이내 조용히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숙직실 안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

 


 키리야는 불 꺼진 CR 한복판에 서서 낮게 웃었다. 딱히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최근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질 않고 도저히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을, 특히 에무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고, 그게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져버려 오늘도 여느 때처럼 CR로 발길을 옮겼다는, 그저 그런 상황일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만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조롭게 흘러가는 건 아니었기에. 지금 자신의 상황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키리야는 학부시절에 배웠던 트라우마의 정의 같은 쓸데없고 단편적인 기억들을 드문드문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다 큰 어른이 되서는 이게 무슨 꼴이람. 키리야는 어둠이 내려앉은 CR을 가만히 둘러보다가 주머니 안에서 아직도 진동중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호죠 에무라는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가 이내 사라졌다. 수십 통의 부재중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에무와 뽀삐, 니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심지어는 대선생(뽀삐의 압박이 작용한 걸지도 몰랐다. 애초에 대선생이 자신의 연락처를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과 백발선생(실질적 발신자는 니코일 것이라 100% 확신했다) 앞으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전부 확인하는건 무리겠다 싶은 수준의 메세지 양에 혀를 내두르며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횟수를 자랑하는 에무의 이름을 눌렀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에무의 얼굴과 함께 에무와 주고받았던 통화내역이 주르륵 펼쳐졌다. 부재중전화 사이사이에 간간히 끼어있는 메시지는 다 같이 CR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꺼니까 키리야씨도 오시라는 평범한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몇 번의 부재중내역이 쌓이기 시작하며 메시지에서 초조함이 조금씩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키리야씨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키리야씨 지금 어디세요?’ 
 ‘전화 좀 받아주세요 키리야씨’ 

 쌓여있는 메시지들을 차분히 읽어 내리던 키리야는 푸스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키리야는 나중에 에무를 만나게 되면 바빠서 연락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미안했었다고 사과하고 기분도 확실하게 풀어줘야겠다고 다짐하며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는 순간 또 다시 진동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키리야는 무시하기로 했다.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고개를 든 순간 키리야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모두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희뿌연 빛이 방 안으로 쏟아진 것과 동시에 에무가 다급한 몸짓으로 CR로 뛰어 들어왔던 것이다. 거친 숨을 내쉬는 에무는 온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고, 거칠게 벽을 밀치며 반동을 이용해 방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어딘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반대편 손에는 검은 화면 너머로 통화연결음만이 들려오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그저 얼떨떨하게 서서 에무를 바라보고 있던 키리야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에무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에무?” 


 익숙한 목소리에 울먹이던 눈동자에 맺혀있던 눈물이 기어코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황해서 에무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키리야는 자신을 강하게 낚아채는 힘에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어라? 하는 사이에 에무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포즈가 되어버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책망하는 에무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약간 젖어있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져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크리스마스라는 단어 그 자체가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또 한 명의 사람을. 그제서야 키리야는 유난히 많았던 에무의 부재중 내역과 메세지에서 느껴지던 불안감이 어디에서 부터 시작된건지 깨달았다. 세상천지에 이렇게 못써먹을 인간이 또 있을까. 키리야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에무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마른 어깨 위에 가볍게 턱을 걸치고 장난스레 키득거리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을 천천히,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웃음기가 섞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키리야는 최대한 마음을 담아 진짜 미안하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에무를 다독였고, 에무는 그런 키리야의 어깨에 가볍게 이마를 박고는 ‘다음부터 말없이 잠수타고 그러면 진짜 가만 안둘꺼에요.’ 라고 웅얼거렸다. 키리야는 ‘응 알았어. 진짜 미안해’라고 대답하며 낮게 웃었다. 그때, 다시 한 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CR전체에 환한 불빛이 돌아왔다. 발랄하다고 해야 할지 방정맞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다소 과장된 움직임에 딸기우유빛의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뽀삐가 CR에 모습들 드러냈다. 아앗-!!! 하는 높은 고음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키리야는 그 소리에 순간적으로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뽀삐는 그런 키리야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키리야의 이름을 부르며 도다다다 달려와 에무를 안고 있는 키리야를 와락 껴안았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에무를 안고, 그런 자신을 뽀삐가 안고 있어서 가운데에 에무가 들어있는(?) 이상한 형태가 되어버렸지만 뽀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뽀삐의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얼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테이블에 착석하는 사람과 그 뒤를 따라 들어와 웃음꽃이 만연한 얼굴로 ‘응, 응!’ 추임새를 넣으며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 에무의 이름을 외치며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와 자신들에게 와락 안겨오는 이. 팔짱을 낀 상대를 한사코 밀어내다가 이쪽을 보고 놀란 토끼눈을 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에게 발길질을 하다가 자신들을 보고는 ‘봐봐 내가 여기 있을꺼라고 했잖아!’ 라고 외치며 금세 기고만장해지는 사람까지. 어쩌면 이렇게 개성만점인 사람들만 모일수가 있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키리야는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그런 고민을 해왔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파라드가 달려듦에 따라 이미 대차게 엉덩방아를 찐 상태였기 때문에 바닥에서부터 찬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게 느껴졌지만 이제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키리야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덩달아 키리야의 위에 올라타있는 두 명의 버그스터들이 활기차게 ‘레이저/키리야도 왔으니까 이제 크리스마스 파티하자, 에무!’ 라고 흥겹게 외치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정작 그들의 사이에 껴있는 에무는 혼자 사색이되어 키리야에게 괜찮냐 물어보기에 바빴지만. 두 명의 외침이 신호가 되어 다들 부산스럽게 파티준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계바늘은 이미 12시를 지나 더 이상 크리스마스가 아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럼 어디, 본인도 뭔가 도와줘 볼까나?”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새하얀 손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선뜻 손을 마주잡고 몸을 일으킨 키리야는 싱긋 웃으며 에무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여주었고, 에무 역시 빙그레 웃어보인 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파라드의 부름에 응답해 달려갔다. 새하얀 얼굴때문에 유독 눈에 띄는 붉은 눈가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외면하며 키리야는 백발선생과 니코의 무리에게 다가가 ‘본인은 뭘 하면 되나?’라고 물었다. 다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벽면에 장식을 거는 사이에 크리스마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있는 게임기 화면 속에서는 검은 인영이 팔짱을 낀 채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늦은,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려 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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