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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신세계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방법

​*가면라이더 빌드의 중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주의해주세요.

 

 


 잠이 오지 않는다는 파트너의 짜증 섞인 불평을 들은 지 어느덧 일주일, “그렇게 잠이 안 오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게 해 줄까?” 비슷한 말을 꺼냈다가 정작 스파링 권유는 하지도 못하고 거절당한 류우가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근육 바보의 머릿속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하다느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재우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부터 글렀다느니, 장장 십여 분을 쏟아진 잔소리쯤은 일 년이 훌쩍 넘는 적응 기간 덕에 어렵지 않게 흘려들었다. 문제는 그다음, 과학자의 탐구 정신과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까지 짚고 나서야 흐지부지 이야기를 끝낸 센토가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며 집을 나선 후였다. 정적은 갑작스러웠다. 전쟁이 없는 세계라면 걱정도 없겠다고 생각했던 처음의 터무니없는 긍정이 가끔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하니까,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류우가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털어내고 싶었다. 여전히(라고는 해도 한결 가벼워진) 걱정은 번번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다. 이름이나 출신 정도는 어렵지 않게 얼버무렸지만 관공서에서 제대로 된 서류 한 장 발급받지 못하는 사정 탓에 번듯한 회사는커녕 아르바이트 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자칭 천재 물리학자의 경험을 살린 발명품을 팔면서 매일같이 헤아리게 된 하루도 안정적인 생활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서로의 시야 안에 서로를 둘 때와 홀로 두 사람 몫의 자리를 채울 때, 단순한 공간감의 변화로는 둘의 차이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류우가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성가신 기색 가득한 눈으로 애꿎은 천장을 노려본 지금은 명백한 후자, 그것도 이른 ‘부작용’이 나타난 시점이 분명했다. 근처의 갈 만한 병원이 모인 곳은 걸어서 이십 분 남짓한 거리였다. 진찰을 받고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계산하며 혼자 감당해야 할 공백을 어림잡는 것이 그 ‘부작용’의 발현을 알리는 증상이었다. 뻔뻔하게 해맑은 얼굴이 시야에서 차단되면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어 나왔다. 키류 센토라는 인물이 그의 인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반강제로 맞춰야 했던 호흡, 혹은 그럴싸한 대화 한번 없이 진행된 일들에 대해 불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 번은 최근까지도 류우가 자신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에볼토에게, 또 한 번은 카츠라기 타쿠미에게 파트너를 빼앗겼던 사건도 대수롭지 않게 주워섬길 수 있었다. 이제 더는 떨어져 지낼 일이 없을 테니까. 강박적으로 따라붙는 조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두 사람 모두 의지할 데라고는 서로가 전부인 처지였다. 몇 번을 쥐어짜고 쥐어짜는 연습 끝에 스스로 다독이는 방법을 찾았어도 마음이 진정되기까지는 언제나 짧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문득, 류우가는 초조해졌다. 생각이 많아지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다. 정확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억지로라도 주의를 환기할 구실이 필요했다. 허공을 헤매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에 맥없이 부딪혔다. 반 넘게 가위표가 그어져 있어 남은 날짜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12월이라고 적힌 글씨가 무색하게 25일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물건이기도 했다. 류우가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저 달력에 검열 아닌 검열이 가해진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렇게라도 해 둬야 크리스마스가 그냥 지나갈 일이 없을 거 아니야.” 달력을 장만한 날 처음으로 표시를 남기던 파트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새삼 귓가를 울렸다. 여러모로 별난 녀석이었다. 그렇게나 신경이 쓰일 것 같으면 12월 25일만 적당히 강조해 둬도 충분했을 텐데, 귀찮다는 이유로 설거지를 떠넘기거나 청소를 미루는 주제에 달력만큼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살폈다. 언젠가는 류우가가 대놓고 물은 적이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며? 나한테는 그래 놓고 넌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냐? 그냥 이 날이 크리스마스다, 하루만 딱 표시해 두면 편하잖아?” 제대로 된 설명 대신 돌아온 대답을 요약하자면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천재 물리학자의 깊은 뜻을 근육 바보가 어떻게 이해하겠어.”


 차근차근 곱씹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또 있었다. 어디에다 애원하는지 제발 잠 좀 자게 해 달라고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매일 자정이 되면 어김없이 빨간색 펜을 들고 달력 앞에 서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들고 나간 발명품이 전부 팔리지 않는 날은 체력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류우가로서도 손에 꼽을 만치 피곤한 하루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칼같이 씻고 누워서 일과를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일찍 잠드는 날은 유독 일찍 깨기 쉬웠다. 목이 말라서, 혹은 볼일이 급해서 일어나는 순간 마주하는 휑한 옆자리는 그럭저럭 익숙했다. 어두컴컴한 거실 한구석에 손을 반쯤 치켜들고 서 있는 그림자야말로 매번 새롭고 낯선 공포였다. 일곱 시에 다시 일어난 류우가가 열 시에 집을 나설 때까지도 뒤늦게 잠든 센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는 것이 류우가의 아침 인사였다. 늦은 시간까지 새로운 실험에 몰두하면서 프로그램을 짜거나 납땜을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기력을 많이 소모하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새로운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류우가는 아(센토는 이것을 바보 도 트는 소리라고 불렀다),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새벽 서너 시는 넘겨야 잠자리에 드는 녀석이 어째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을 하는 거지?


초조함 대신 의문이 가득해진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류우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나 제멋대로인 기질 따위야 지극히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숨기거나 입을 다물지 말자고 분명히 짚어 두었었다.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시시콜콜한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한 모양새가 퍽 귀엽다고도 생각했었다. 짜증 섞인 눈초리가 재차 달력으로 향했다. 마지막 장에 남은 숫자는 24부터 31까지 전부 여덟 개였다. “석 달 넘게 피우던 난리도 내일이면 끝나겠네.” 아무 의미 없는 혼잣말이었다. 한껏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만 해도 류우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받아칠 사람이 자리를 비운 덕택에 가까스로 혼잣말이 된 투정임을 지나치게 빨리 깨달았을 뿐이었다. 달력 맞은편의 시계가 새삼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열한 시였다. 평소대로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에 외출해서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파트너를 생각하자 심술을 누르려던 마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쩐지 이것저것 잘 말한다 싶었지.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쏙 빼놓고 있었잖아?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말로만 파트너라고 해 주면 다냐!” 언제 열렸는지 현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대꾸가 돌아왔다. “그래, 그래. 이번엔 뭐가 문제야?”


 완전히 무방비한 얼굴로 돌아본 자리에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병원에 다녀온 사람치고는 양손에 든 짐이 제법 많아 보였다. 한참 말이 없던 류우가가 어색한 헛기침 두 번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뭐냐, 병원 갔던 거 아니었어? 뭘 그렇게 잔뜩 가져와서는.” 센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턱으로 달력을 가리켰다. “오늘은 안 나갔나 봐. 뭐…, 나간 김에 겸사겸사.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내일이고.” 묘하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자기 쪽은 보는 둥 마는 둥 짐을 들고 곧장 방으로 향하는 파트너를 보며 류우가는 무심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야, 센토. 너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 병원에서는 이렇고 저렇다더라, 그런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알 거 없다는 식으로 그냥 방에 들어가는 건 또 뭔데?” 항의가 무색하게 방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 안쪽에서는 가벼운 콧노래와 함께 이것저것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서는 당장 안으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누군가의 씩씩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 없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제 일에 집중하는 센토와,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방문만 노려보는 류우가의 신경전은 그 뒤로 한참을 이어졌다. 결국 바삭, 하고 팡팡, 하고 큐잉, 하는 괴상한 소음을 신호로 방을 향해 돌진한 류우가가 열린 문에 머리를 얻어맞으며 마주한 것은 정체 모를 붉은 꾸러미를 한 아름 안고 선 센토였다.


 “뭐, 뭐야, 그거. 뭔데. 뭐냐고! 색깔부터 장난 아니게 수상하잖아! 별로 알고 싶지 않아졌어! 오지 마!” 반쯤 누워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류우가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파트너의 기척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한쪽은 멈출 생각이 없고 다른 쪽은 앞뒤를 살필 겨를이 없다 보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이윽고 벽을 등진 류우가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머리에 푹신푹신한 무언가가 얹어진 뒤를 이어 엑스자로 몸을 감싼 팔 위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걸쳐졌다. 잔뜩 굳어 있는 파트너를 보다 못한 센토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도 들렸다. “입어도 별일 없으니까 안심해.” 류우가는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조금 전의 처절한 기색이 희미하게 남은 채였다. “……뭔데?” “직접 봐. 네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거니까.” 팔을 뻗고 정수리를 더듬어 그러모은 것들은 무려 산타 복장 세트였다. 류우가가 어이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설마 병원 갔다가 이거 사느라고 늦었냐?” “병원? 당연히 안 갔지. 일주일 동안 알리바이 만드느라 고생하긴 했는데, 다 깊은 뜻이 있었으니까.” “말이나 못 하면.” “그래서 안 입어? 내 선물인데?” “잔뜩 신경 쓰이게 해 놓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나와? 어?” 잠시 입술을 삐죽인 센토가 곧 불쌍한 눈빛을 보내며 손을 모았다. 그와 동시에 류우가는 전부 해탈하기로 마음먹었다. “부탁이야. 부탁할게. 부탁해. 응?” 그래, 내가 이 녀석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이번 크리스마스를 기분 좋게 보낼 리가 없지.


 “알았으니까 순순히 수염도 내놔라. 제대로 하는 거 아니면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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