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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이 너무 늦다고, 너.”
“죄송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히로토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리는 기분이었다. 뭘 어떡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할 처지나 되는 거야? 이제 겨우 마음을 자각했고, 히로토의 말대로 자각이 너무 늦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봐라, 저 쪽은 벌써 지쳐 저만치 멀어지려고 하지 않나.

“렌이 더 지치기 전에 붙잡아야 할 거 아냐.”
“너무 늦지 않았을까……?”
“멍청아, 알기는 알아?”

히로토의 꾸중에도 소스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외에는 아무것도 하질 못 했다. 그래, 할 수 있는 게 없겠지. 렌은 벌써 몇 번이나 마음을 고백했고, 소스케는 눈치가 없어서 그걸 단순히 동료나 우정으로만 생각했다. 성격 좋고 여유로운 렌도 사람인지라 분명 아팠을 것이라고, 그게 결국 쌓이고 쌓여, 웃음이 많던 렌이 스스로 지쳐 멀어지려고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뒤늦게 자각한 소스케를 렌이 기다려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얼른 가서 찾아봐야 할 거 아냐!”

렌이 갈 데라고는 본가밖에 더 있나, 그러니 아마도 거기 있겠지만 문제는 소스케가 갔을 때 렌이 그를 만나줄지 하는 문제였다.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게 당연한 것일 테니까. 그래도 히로토는 렌에게 소스케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가 아니면 렌을 돌릴 수 없다. 만날 수 없고, 이야기 나눌 수 없고, 진심을 담아 사과할 수 없고, 마음을 전할 수 없다. 소스케만이 렌을 밖으로 돌려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닫으려고 하고 있는 그를 다시 돌릴 수 있고,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가서 똑바로 만나고 와.”
“히로토…….”
“내가 남의 연애사에 이렇게까지 관여할 정도로 한가하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진짜……, 너네 둘 다 사람 좀 그만 신경 쓰이게 하란 말이야.”

히로토는 며칠 전 밤, 제게 찾아와 이런 저런 고민을 털어놓던 렌을 똑똑히 기억했다. 달빛 아래서 제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던 렌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히로토는 그를 가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물론 그 전부터 렌의 행동이나 소스케의 멍청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마음들에 신경이 쓰여 몇 번이나 돌아본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밤의 렌이 너무도 신경이 쓰여서 결국 소스케가 자각하게끔 유도해서 마음을 자각하게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랬을 때는 이미 렌은 너무 늦어버린 후였던 거다. 렌은 이미 지쳐 반쯤은 포기했고, 차라리 소스케를 보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도망쳐버린 후였으니까. 그러니까 이 일에 히로토는 좋든 싫든 어느 정도 관여하게 되었고, 연관이 있게 되어버린 거였다. 스스로가 결정한 사안이기에 누구에게도 잘못을 탓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잘못된 일을 바로 잡고 싶었다. 렌이 이 이상 상처 받는 걸 원하지 않았고, 이 이상 소스케가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탓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소스케 잘못이기는 하지만.

“렌, 있나요?”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히로토의 성원에 못 이긴 것도 있었고 스스로도 렌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소스케가 결국 첫 차를 타고 렌의 본가로 내려왔다. 여전히 손님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여관에 소스케가 들어섰다. 일전에 렌과 함께 온 적 있었기에 여관 직원 모두가 소스케가 렌의 동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스케의 물음에 여관 직원이 그를 렌의 방 앞으로 안내했다. 며칠 전에 갑자기 돌아오셔서 그 뒤로 나오고 계시지 않는다는 말에 소스케가 한숨을 삼키고 감사 인사를 했다.

들었던 손이 멈춘다. 문을 두드리려 쥐었던 주먹을 펴고 문 위에 손을 대었다. 이 문 뒤에는 렌이 있다. 제가 온 줄 안다면 자신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할지도 몰랐다. 뻔히 알고 있는데도 소스케는 왜인지 겁이 나서 잠깐 동안 그렇게 문에 손을 댄 채로 가만히 서 있다 다시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소리가 두어 번 정도 들리고 한참의 정적을 깨고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렌, 나야.”

조용하다.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아예 무시를 할 줄은 몰랐는데, 하는 사이 문이 살포시 열린다. 고개를 빼꼼 내민 렌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단정한 모습에서 머리가 조금 부스스한 것만 빼면 모든 게 그대로였다. 괜시리 안심이 되었다.

“소스케……?”
“다행이다. 나와줘서 고마워, 안 나올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면 보고 싶었는데, 라고 할 뻔해서 렌은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고 문을 활짝 열어 소스케를 마주할 뿐이었다.

“일단, 그 동안의 고백에 이상한 대답만 해서 미안했어. 설마하니 나는 렌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정말 몰라서, 믿을 수가 없어서, 그냥 정말 동료로서 좋아한다고 얘기해주는 줄 알고 그랬던 거라…….”

그 말에 렌은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어냈다. 알고는 있었다. 막상 들으니 더 믿을 수가 없었을 뿐. 소스케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눈치가 없었구나, 하며 렌이 다시금 그의 눈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랬군요,”
“응, 미안.”
“뭐가 미안해요. 소스케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렌이 힘들었으니까.”

알고 계셨네요, 모르는 게 이상한가.

“그렇지만 그 일로 소스케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그건 그만 잊어주셔도…….”
“렌, 정말 그걸로 돼?”

네?
정말, 그걸로 되겠냐고.
그럴 리가 없다. 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욕심이라고는 부려본 적도 없었다. 순전히 소스케를 위해서, 그가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지만 욕심이 안 날 리가 없었다. 렌도 사람이고, 하물며 상대는 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인데, 사랑하게 된 이에게 욕심 하나 안 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렌.”
“……솔직히 말하면 안 잊었으면 좋겠어요. 계속 기억해주셨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 좋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욕심 부려서 죄송해요.”

렌,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여기 왔어. 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도 전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함이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있지, 렌.

“늦게 자각했어, 내가 렌 좋아하는 걸.”
“……네?”
“미안해, 나도 내 마음을 몰라서 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저 12월 마지막 즈음에 들어있는 평일의 빨간 날. 조금은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 날의 아침은 여느 때와 아주 조금 달랐다. 렌에게 있어서 그 날은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가장 특별한 날다운 날이었을지도 몰랐다. 서프라이즈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조금 부족한 고백에도 렌은 그저 날의 특별함 때문인지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던 소스케가 고백을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는지 그 아침이 너무도 특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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