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 느즈막한 시간에 일어난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배게가 구석으로 날아가있어 막 그것을 주워다 개킨 이불 위에 얹은 치아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이런 시간인데 깨워주는 쿠로코는 커녕 저택은 너무나도 고요에 잠겨 있었다.
쌀쌀한 공기. 계절에 걸맞는 두툼한 후드티에 얼굴을 끼워넣은 치아키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동동거리는 일상같은 발소리도 들리지 않아 오히려 조금 겁을 집어먹은 채로 평소답지 않게 살금살금 복도를 걷는다.
" 뭐 훔치기라도 했나보지? "
" 아! 소리좀 내고 다녀라... "
그리고 누가 뭘 훔쳐! 가슴을 쓸어내리가 무섭게 오른손을 치켜들며 효과없는 행동을 하는 치아키를 물흐르듯 제지시킨 타케루가 천천히 비어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제는 행동이 몸에 붙어버려서,저도 모르게 타케루의 뒤를 따른 치아키도. 결국 두 사람이 조용한 공간에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을 즈음, 치아키는 그냥 잠이나 더 잘걸. 하며 속으로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평소같지 않은 공간에서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 타케루 역시, 조금은 어색한 공기가 답답한지 들고있던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것으로 답답함을 해소하려는 듯 하다.
결국 참지 못한 것은 치아키여서, 후드티 양 옆으로 파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열심히 평소의 목소리를 목에서 튀어나오게 했다.
" ... 저기, 다들 어디갔어? "
" 류노스케는 친구와 함께 가부키 공연을. 마코와 코토하는 코토하의 언니 병문안. 겐타는 직접 재료를 구한다고 바다에 갔고, 할아범은"
" 자 자자잠깐 "
너무 빠르다고... 숨 좀 쉬고 말해.
바닥에 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짓고있는 황당하다는 표정이 과연. 타케루가 남은 차를 깨끗이 비우며 '할아범은 가족들에게. 쿠로코들도 마찬가지다.'라며 어정쩡하게 이야기의 갈무리를 했다. 3류 연극의 배우나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 것이었다. 비어있는 찻잔이라 더이상 회피할 수도 없어 타케루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치아키도 마찬가지로 등을 벽에 기댄 채 말이 없다.
잔을 자리 옆에 내려두었지만 거두어가는 손길이 없다. 타케루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애써 정리하고자 눈을 감았다.
가신을 사랑한다는 일,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한참 오래전에 일었던 선 당주들의 전기에도 그런내용만은 들어있지않아 난감하던 차에 류노스케들에게 들켜버려서는, 결국 당사자인 치아키 빼고는 저택의 모두가 알아버린 '주군님의 짝사랑'이 화근이었다.
당장에 내일이 크리스마스니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어떠냐-라는 류노스케의 제안이 어제였다. 저택의 모두가 아침 이른 시간에 모두 집을 비웠다. 현관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자신들의 주군에게 건투를 빌어준 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그 커다란 공간에서 둘만이 있게 해준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의심이나 살 행동을 하고 만 것이었다.
" 헤에. 그럼 오늘은 타케루랑 나 둘만 저택에 있는거야? "
" ... 그런 셈이네. "
빈 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타케루가 자리에서 들썩거렸다. 알고는 있지만, 결국 직접 사실을 듣고 나니 견딜 수가 없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류노스케나 코토하나 다들.... "
" 오늘, 크리스마스니까. "
" 에, "
" 너답지 않네. "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된 거지!
통통 튀어다니는 목소리다. 아무래도 조금 멋쩍은 모양이었다. 하기사 외도중이니 신켄쟈니 해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타케루 자신도 그들의 언질이 없었으면 모른 채로 지나갔을 오늘이다. 옅은 한숨이 얹어지자 겨우 아까 전까지의 경직된 공기가 풀어진다. 천천히 앉아있던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타케루가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았다. 앞에 앉은 치아키의 눈이 동그래진다.
" 뭐 하는데...? "
" 그냥. "
" ... 죽는 거 아니지? "
결국 커다란 손에 뺨이 붙잡히고 나서야 치아키가 연신 항복을 외쳐댔다.
언제나처럼 경직되고 곧기만 한 자세가 아니라, 자신처럼 풀어진 모습을 하고있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본 것이어서. 볼을 매만지던 치아키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진작 좀 이래보지. 훨씬 보기 좋은데.
바닥에 양 손을 붙이고 고개를 조금 젖힌 타케루는 분명히 자신이 모셔야 할 주군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 또래인 평범한 20대에 불과했다. 평소의 그는 아닐지라도. 완전히 경게를 해제한 모습이 영락없이 그랬다. 괜히 웃음이 비식비식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 그래서? 너는 계획같은 거 있어? "
" 딱히... 없는 것 같은데. "
" 나갈까? "
집 안에만 있어봐야 하루종일 할 것도 없잖아. 둘이서. 어때?
하기사 성탄절이라는 제법, 아니 많이 큰 기념일인데 밖에 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법 했다. 오히려 하루를 더 보람차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언제나처럼이랑은 다른 날이니까.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는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
사람이 많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많을 줄이야.
무르익은 성탄절의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거리가 꽤 북적였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평소보다 가깝게 붙어서 움직이게 된 두 사람이 그들의 사이에서 정처없이 걸었다. 둘이서만 나가자고 외친 것은 좋았으나, 막상 어딘가 가자고 하자니 타케루의 취향따위를 모르는 치아키는 조금 망설이게 되어서, 안굴러가는 짱돌같은 머리를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주 가는 게임방이나 만화책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편협한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데려다 놓아도 눈만 꿈벅거릴 거 같아서 말이지. 게다가 평소에 가는 곳이라면 특별한 날인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일 년에 하루밖에 없는 날인데.
" 어떡할까? "
" 어떡하냐니. 나오자고 한 건 너다. "
아무래도 타케루는 오늘의 계획을 전적으로 치아키에게 맡기기로 한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기울이는 타케루의 표정이 퍽 얄밉다. 이상하네, 어제도 그 표정이었는데.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은 채 걷던 치아키가 꽤 북적한 곳을 발견한 것도 그 참이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의 거리 판매에 나선 참인지 빨간색과 하얀색의 상자가 겹겹이 쌓여 있다. 산타 옷이나 루돌프 옷을 입은 채 바쁘게 움직이며 상자를 나르거나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외출에 흥미를 잃어가던 갈색의 눈동자가 빛을 찾기 시작해서 타케루도 치아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다가, 홱 돌아보는 몸짓에 눈이 커진다. 아까같은 툴툴거리는 표정이 아니라,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의 유쾌한 표정.
어디서 반했냐고 물어보면, 사실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자신은 꽤 오래전에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스스로 단정지어버리고는, 언젠가부터 그 표정에 눈이 가고, 계속 보고싶다고 생각하고. 어렵겠지만, 병에 옮듯 그 부분을 닮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돼서. 조금 상기된 뺨에 찬 공기가 닿아 타케루가 눈을 끔벅이다가 붉은 색 목도리에 조금 얼굴을 묻었다.
" 혹시 다들 저녁에는 돌아와? "
" ... 아마도. "
" 그럼 파티하자! "
크리스마스 파티!
쌓여있는 케이크상자를 가리키며 치아키가 웃었다. 이래서야 둘만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류노스케들이 큰 맘 먹고 저택을 비워줬는데 말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겠지 싶어 타케루가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갈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차는 손가락. 쓰다듬는 손길은 어색하지만 나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다정했다. 한참동안 조금 각진 행동을 받아내던 치아키의 표정이 상기된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가, 미간에 주름을 잡는 과정이 꽤 익살맞다.
" 키 작다고 무시하는 거야? "
"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 할거야 말거야! "
" 하고싶으면 하자. "
우선, 뭔가를 같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케이크를 사려는 줄의 끝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조금 구름이 낀 하늘에서 밭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사고 싶었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바로 앞에서 품절이라니. 아쉬운대로 고른 초콜릿 케이크가 든 빨간 케이크상자를 양 손으로 껴안은 치아키가 댓 발이나 나온 입을 하고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아무래도 눈이 더 거세게 내리기 전에 돌아가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어서, 타케루가 양 손에 들고있던 쇼핑봉투를 고쳐잡고 날랜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며 나란히 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조용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즈음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치아키가 럭키를 외치며 머리에 붙은 눈송이를 털어낸다.
" 9시에는 다들 오겠지? "
" 글쎄. "
" 뭐야, 다들 그런 얘기도 안하고 간거야? "
그야 이런 파티는 예정에 없었으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는 타케루를 뒤로한 채 케이크를 냉장고에 집어넣은 치아키가 테이블에 올려진 봉투를 뒤적거렸다. 아까 그 루돌프 옷 말이야, 마음에 들었는데. 열히 계산을 하던 점원의 차림새를 말하나 보다. 아쉬운대로 샀던 순록뿔 머리띠를 꺼내 흔들며 치아키가 조잘거린다. 조금 조잡한 티가 났지만, 당일이 되어서야 파티를 계획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다 팔리고 남은 것을 사올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알고 있으니 그 이상 얘기하지 않는 치아키의 옆에서 타케루도 다른 봉투를 뒤적였다.
" 있지. "
" 응. "
" 타케루 너는, 연애같은 거 안해? "
" 되게 뜬금없지 않아? "
" 뜬금없이 궁금해졌어. 크리스마스면서 다들 나갔는데 혼자 있고. 너도 나가지. "
" ... 그건, "
말을 꺼내려다 급하게 입을 다물어버린 타케루를 올려다보며 치아키가 응? 하고 되물었다. 대답대신 고개를 흔든 타케루가 계속 말하라는 눈빛을 보낸다. 제발 그냥 말 하던거 계속 해줄래. 간절함이 통한 것인지 다시 봉투로 시선을 돌린 치아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나까지 나갔으면 혼자 있었을 거 아냐. "
"어.... 그러네. "
" 뭐야 그 반응. 내가 안나갈거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타케루는 결국 '마음대로 생각해.' 라고 짤막하게 대꾸하며 대화를 끝냈다. 속된 말로 망했다. 고 하나. 이렇게 티 나게 '니 말이 맞아요' 라는 것을 증명해 준 셈이었다.
치아키도 더 묻지 않는다. 자기도 질문했지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지만.
" 다들 언제 올까? "
" 안 올수도 있지. "
조금 거칠어진 눈보라가 보이는 창밖을 가리킨 타케루가 치아키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아쉬웠는지 입술을 비죽대는 표정이 눈에 띈다.
" 어떡할까? 준비했는데, 아까워. "
" ... 하자. "
" 뭘? "
" 파티. "
하고싶다며. 테이블에 올려진 아까의 그 머리띠를 상대의 머리에 눌러씌운 타케루가 입꼬리를 올렸다. 비죽 튀어나와있던 싸구려 부직포로 만들어진 산타모자까지 덮어쓴 타케루가 닫은 지 얼마 안 된 냉장고를 열어 케이크 상자를 도로 꺼냈다. 그것을 들어보이며 멋쩍게 웃어보이는 표정이 나름 진심으로 통한 것인지(당사자는 본격적인 진심이었지만) 치아키가 샌웃음을 내며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고개를 끄덕거린다. 조금 붉어진 귀 끝을 보지 못하고 케이크 상자를 든 채 부엌을 빠져나온 타케루의 얼굴이 다시금 안도로 물들었다.
***
둘만 앉은 조용한 응접실안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여전히 머리띠와 모자를 눌러쓴 채로 가운데 덜렁 놓여진 케이크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비장하게 포크를 치켜들었다.
" 잠깐, 단 거 좋아해? "
" ... 일단 뭐든 잘 먹는 주의야. "
마코가(누나가) 만든 것 말고.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케이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원 모양 케이크가 야금야금 줄어든다. 역시 여태 단음식에 길들여져 있는 치아키의 쪽이 더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타케루도 나름 선방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 먹기에는 조금 많이 버거운 모양이다. 케이크의 1/3을 남겨둔 상황에서 포크질이 느릿해지더니 결국에는 멈추어 버린다.
" 남은 건? "
" 먹고싶은 사람이 먹으라고 하자. "
" 배불러? "
" 응. 아까 오기 전에 핫케이크 먹었잖아. 그 전에 아침대신으로 라면도 먹었고. "
시계추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까딱거리던 치아키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비록 생각했던 대로의 왁자지껄한 파티가 아니라 근엄하신 주군님이랑 단 둘이 한 작디작은 파티(파티라 하기도 뭣한 케이크 시식)였지만, 나름 만족했다는 느낌의 표정이라 맞은편에 앉은 타케루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있지. "
" 응. "
" 아까 그 질문 말이야. "
기억해? 하고 물어오는 것이 아까와 다르게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케이크를 상자에 넣어 옆으로 밀어둔 타케루가 눈을 깜박이며 여러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오래되지 않았으니 까먹을 리가 없지만, 입을 다물어버린 타케루 대신 치아키가 계속 말을 이었다.
" 내가 안 나갈거. 알고 있었지? "
" ... "
"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너랑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이상하잖아.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는 하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라진다는 건. 그 쿠로코들도. 가느다란 눈초리다. 눈치 챘나? 어지간히 표정관리가 안된 모양인지 치아키가 미묘하게 표정을 바꾼다.
재미있어서 죽겠단 얼굴이었다.
" 다들 약속이 있다는건 진짜겠지만 왠지 다들 짜고치는 것 같단 말이야. 내가 물어봤을 때 너. 무슨 연기하는 것 마냥 대답한 것도 그렇고. "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말투로 거기까지 뱉어낸 치아키가 답지않게 우물쭈물거리고있는 타케루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입에 남아있는 달콤한 버터크림의 향기가 촉진제라도 되는 것 마냥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 근데 나는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궁금해서. "
" 그건, "
" 혹시 말이야. 내가 말하고도 조금 웃긴 말인데. 타케루 너 있잖아... "
말꼬리를 늘린 치아키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느새 아까의 풀어진 자세가 아니라 딱딱하게 경직된 상대의 표정과 자세가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린 치아키가 작게 숨을 뱉어내며 아니다. 하고 추리를 일단락시켰다. 응접실 안에 고요가 들어찬다.
'' 생각이 바뀌었어. "
" ... 치아키, "
" 나는 직접 듣고싶으니까. 그만둘래. "
기다려줄까? 얄궂게 웃고 있지만 아무래도 귀 끝이 아까처럼 붉다. 달아오른 색을 답지않게 멍하니 바라보던 타케루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판은 다 깔아졌고, 몇 수십번을 바라왔던 상황이 지금 눈 앞에.
" 치아키. "
" 응. "
" 나는, 너를. "
잠시 숨을 고른 타케루가 입을 여는 순간 꽤 큰 우당탕 소리가 저택을 들썩거리게 했다. 놀란 토끼 눈으로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넘어져있는 류노스케를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류노스케가 튀어나온 벽의 뒤에서 나타난 마코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역시 같은 곳에서 나온 코토하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우짜면 좋노...' 하고 말끝을 흐린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넘어진 류노스케를 바라보던 겐타는 맥빠진 한숨을 길게 뽑아내었다.
" 주군! 그게, 그러니까! 제가 발이 꼬이는 바람에...."
마코와 코토하, 겐타뿐만 아니라 앞이 가려진 쿠로코까지.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내던 류노스케가 결국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머리를 조아리며 크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 ... 완전히 놀아나버렸네. "
" ... "
" 그치만, 기다리고 있을게. "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타케루.
고요했던 저택이 다시금 왁자지껄해진다. 모두들에게 둘러쌓여 당혹스러워하는 류노스케에게 다가간 치아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결국 하고싶었던 얘기는 하지 못했지만. 타케루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소란스러운 무리로 스며들었다. 정말 똑같은, 어쩌면 조금 달라질 일상 속 조금 달라진 기류가 퍽 달다.
다시금 머리 위에 얹어지는 다정한 손길과, 늦은 축하인사가 겹쳤다.
" 메리 크리스마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