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편 최종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을 주의해주세요.
예정보다 이른 눈이 쌓여 하얀 거리는 잔뜩 흥분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껏 들뜬 웅성거림과 그에 장단 맞추듯 시끄러운 노래가 거리에 울려 퍼지는 건 나쁘지 않은 풍경이다. 작은 노점상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호객을 하던 반죠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다. 많은 사람의 기념일이자 휴일이라고나 할까.
반죠는 크리스마스를 그리 기다리지 않았다. 휴일을 챙길 거였으면 내킬 때 그냥 쉬어버려도 되는 노점상인이었기 때문일까. 거리에 가득한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는 건 괜히 옆구리가 시려오는 일이기도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반죠!”
“오, 왔냐!”
“오늘은 많이 팔았어?”
“평소보단 좀 더? 연인들을 위해! 라고 광고를 하니까 많이들 사가더라고.”
겨울이 훌쩍 다가온 날은 초저녁임에도 이미 어두컴컴했다. 목도리를 꽁꽁 싸매고 노점상으로 달려온 센토는 추위에 콧잔등까지 벌게져 있는 상태였다. 대충 주위를 구경하며 짐을 싸던 반죠는 행동을 빨리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센토에게 건넸다. 자, 추운데 너 써. 그 짧은 새 센토가 맨손인 걸 알아챈 그 덕분에 센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장갑을 받았다.
“영화까진 아직 시간 있는데.”
“바보야. 저녁 먹어야지.”
“아 맞다.”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는 소소한 대화와 함께 걸음을 맞춰 걷기 시작한 둘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가도 사람으로 북적이는 가게들을 하나씩 고르던 둘은 마침 자리가 난 가게를 골라 들어섰다. 평소엔 딱히 관심도 없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은 역시나 커플, 그리고 가족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비싼데.”
“확실히 우리의 자금 사정으로는 조금 비싸네.”
“나갈까?”
“됐어. 이런 날도 있어야지.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쿨하게 반죠의 걱정을 날려버린 센토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주문서에 거침없이 메뉴를 써 내려갔다. 그에 질까 냉큼 주문서에 먹고 싶은 것들을 마구 쓴 반죠는 전부 먹어치워 주겠다는 기세였다.
벨을 누르고 직원이 주문을 확인한 뒤, 식전 음식으로 나온 빵에는 귀여운 미니 산타 장식이 달려있었다. 음식 메뉴도 전부 크리스마스구나.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수준의 크리스마스. 거리의 연인들을 지겹도록 봤지만, 그건 지루함에 가까웠지 질투라는 감정은 아니었다.
눈앞에 번듯한 연인이 앉아있고 지금을 함께하고 있다. 반죠는 잘 벗어둔 장갑과 물을 마시고 있는 센토를 번갈아 가며 보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야?”
“아니. 그냥.”
별 거 아니야.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참은 반죠를 미묘하게 쳐다본 센토는 잔을 내려두었다. 마치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그걸 그냥 삼켜? 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만 같다. 애써 눈빛을 옆으로 흘리며 시선을 돌린 반죠는 문득 턱을 괴고 옆자리의 행복해 보이는 가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법한 단란한 가족이었다. 이제 막 소학교에 들어갈 법한 아이와 줄줄이 나오고 있는 음식들을 받아들고 웃음꽃이 만발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부모님까지. 이런 특별한 날에 어울린다는 사람들은 저런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 반죠의 생각은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중얼거림으로 흘러 나오고 말았다.
“하? 무슨 소리야.”
“뭐, 그런 거지.”
“…….”
다시 돌아온 센토의 미묘한 표정과 눈빛에 반죠는 멀리서 걸어오는 직원을 보며 급히 주제를 돌렸다. 사람들이 많아서 가게가 엄청 바쁘겠다느니, 음식이 나오는데 우리가 시킨 것 같다느니. 센토는 미심쩍은 눈을 이내 거두고 반죠가 말하는 주제에 쉽게 호응해주었다. 그를 향한 배려일지도 모를 센토의 의도에 보답하듯 반죠는 더욱 흥겹게 대화를 이끌어나갔고,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은 후 그들의 테이블에는 많은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둘이 먹기엔 꽤 많은 양을 시켰음에도 접시는 하나둘 비워져 나갔다. 소스까지 싹싹 긁어 먹어 바닥을 보이게 한 후에야 포크나이프를 내려둔 둘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후아. 엄청 잘 먹었어.”
“나도. 배 터질 것 같아.”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일어서 계산을 마친 둘은 가게를 나서며 예상치 못한 바깥의 상황에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와.”
눈이 내린다. 이미 거리에 쌓여있는 눈 위로 새하얀 눈이 다시금 쌓이고 있었다. 굵은 눈송이가 이렇게까지 쏟아지는 겨울은 처음이다. 흥겨운 캐럴과 섞여 나오는 라디오 뉴스들은 도쿄의 이례적인 폭설을 전하고 있었다.
“반죠, 우리 이대로면 늦겠어!”
“엥?!”
레스토랑에서 계획보다 긴 시간을 보냈나 보다. 넋을 잃고 눈을 바라보던 센토는 퍼뜩 시계를 확인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여기서 영화관까지는 적어도 십 분이 넘게 걸렸다. 더군다나 눈까지 내려 길이 미끄럽다. 마구잡이로 뛰어가기도 힘든 길에서, 영화 시작까지는 십오분이 남아있었다. 택시를 탈까? 가장 빠른 수단을 찾아내 꺼낸 센토와는 달리 반죠는 왜 그런 짓을 하냐며 순간 센토의 팔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많이 먹었으니 뛰어보자고!”
“이 근육 바보가!”
무작정 뛰기 시작했어도 반죠는 센토가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유지했다. 십 분 내내 뛸 수는 없으니 최대한 길게, 걷는 것보다는 빠르게 앞장서던 반죠덕에 센토는 헉헉거리면서도 따라갈 수 있었다.
간신히 영화관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자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서둘러 표를 확인해 상영관 안쪽으로 들어선 둘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작 안 해서 다행이다.”
“그러게. 후우, 후.”
“옷 털고 싶은데.”
“안 돼.”
이미 광고가 나오기 시작한 영화관 안에서 옷을 털 수는 없었다. 찝찝해도 참아야지 뭐. 불만을 중얼거린 채 의자에 편히 앉은 반죠와 센토는 곧 시작된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둘은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듯,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나가는 사람의 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진짜 잘 만들었어. 뭔가, 사람을 찡하게 만든다고 할까.”
“맞아. 이런 내용은 역시 겨울에 딱이야.”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영화관을 나선 둘은 문득 여전히 내리고 있는 눈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많은 시간이 지난 늦은 밤 거리에는 이제 가족 단위가 아닌 연인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별한 날은 무엇일까. 센토가 멍하니 서 있자 반죠는 그를 따라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죠. 메리 크리스마스.”
“벌써 자정 지났어?”
“아니.”
“흐음, 뭐. 센토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고개를 돌려 마주 본 둘의 표정엔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신나서,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닌 그저 잔잔한 행복이 포함된 부드러운 표정은 끊임없이 내려오는 눈송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문득 이제 갈까, 라는 말을 중얼거린 센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반죠의 손을 일부러 꺼내 잡아 깍지를 꼈다. 물론 평소 먼저 손을 잡거나 하지 않던 센토의 행동에 놀란 반죠는 섣불리 발을 떼지 못했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너랑 난 연인이잖아, 반죠.”
“그렇지?”
안 그래도 바본데 더 바보처럼 되묻지 말고! 계속해서 타박하는 말과는 달리 센토는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연인이자 가족이잖아. 그러니 우리도 특별히 이날을 즐기자고.”
어쩐지 센토가 말끝을 흐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로서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위로같지 않은 사랑의 말을 고른 거겠지.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그래, 아까는 정말 바보같은 고민이었다. 반죠는 큰 고함을 한번 지른 뒤 제 손에도 힘을 주며 말했다.
“……좋아해, 센토!”
“당연히 그래야지.”
“대답이 좀 이상한데? 이럴 때는 나도 좋아해 반죠! 라고 돌아와야, 아야. 아! 꼬집지마!”
사그라들줄 모르는 눈 속으로 들어선 둘은 전혀 춥지 않았다. 서로와 함께하는 신세계에서의 특별한 첫 크리스마스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